[분수대]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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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파리와 런던은 한때 망명의 도시였다.

이 두 도시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망명객들이 정착지가 확정될 때까지 시름을 달랜 곳이다.

한창때의 마르크스가 잠시 기거하던 런던의 집, 파리의 아파트에는 아직 그 표지를 남기고 있다.

파리에 본부를 둔 발레 뤼스, 즉 러시아 발레단은 옛 소련을 등진 무용수들이 러시아 민속무용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곳이다.

망명은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민족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조국을 버리고 딴 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말한다.

망명객이 들끓는 도시와 또 그런 도시를 가진 나라는 포용력이 있고 인간존중의 품격을 지닌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다.

엊그제 카이로와 파리에서 동시에 망명한 북한 형제외교관이 망명지로 한국이 아닌 미국을 택했다는 일보 (一報) 를 보고 우선 이런 느낌이 든다.

상해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우리로선 망명자들에게 너그러워야 할 역사적 빚이 있다.

그런 나라로서의 명성을 지닌 프랑스가 자국으로의 정치망명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관련법을 개정하기로 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일정기간을 기다린후 망명허용 여부를 판정받는 규정을 간소화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과거 독재국이었다가 이제는 민주국가로 바뀐 나라의 경우 망명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규정도 함께 담는다고 한다.

이러면 망명의 기회는 넓어지는 것인가, 좁아지는 것인가.

장승길.장승호 형제의 망명은 매우 극적이다.

이들 형제가 파리로 합류했다는 설, 카이로로 합류했다는 설이 있다.

어떤 경우라도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것같다.

미국 중앙정보국 (CIA) 이 개입됐다고 하니 냉전수행에서 갈고 닦은 솜씨가 얼마나 잘 발휘됐을 것인가.

CIA.소련국가보안위원회 (KGB) 와 맞먹는다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협력설은 흥미조차 더한다.

장승길 형제의 망명은 북한 미사일의 대 (對) 중동수출에 관한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외교관의 망명은 대체로 기밀보고를 들고 나오는 것에 비유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한때 북한외교에서 중요 역할을 한 황장엽 (黃長燁) 비서의 망명으로부터도 상당한 정보를 캐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黃씨의 정보는 통일을 앞당기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지 아닌지…. 겉으로는 黃리스트 얘기만 나와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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