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과학 칼럼

‘클라크의 법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영국의 천문학자 리처드 울리는 1956년 왕립천문대장에 취임하며 타임지와 한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여행이란 완전히 허튼소리다. 투자할 가치가 없다. 인류가 거기서 무슨 이득을 얻겠는가.” 소련에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올라가기 불과 1년 전에 나온 이 용감한(?) 발언을 보면 ‘클라크의 법칙’이 떠오른다. 아서 클라크는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 등을 발표한 저명한 과학소설 작가이자 미래학자다. 그의 어록을 정리한 클라크의 법칙은 이런 것이다. “매우 유명하고 나이 지긋한 과학자가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면 대부분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명쾌한 논리와 실증주의의 세계일 것 같은 과학계도 사실은 의외로 비합리적인 면이 있다. 특히 권위적인 주류 학파의 보수성이 혁신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도 종종 있다. 리처드 울리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예인 셈이다.

필자가 최근에 각별하게 주목하고 있는 연구가 하나 있다. 기존의 의학 패러다임을 일거에 뒤집을지도 모를 학설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에 대응하는 의학계의 태도도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북한에서는 김봉한이라는 학자가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일제시대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의대 교수로 일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체에서 혈관계나 림프계와는 전혀 별개인 새로운 순환계를 발견했다면서 이를 ‘봉한관’으로 명명하고 수차례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북한 정부는 연구소를 설립해 주고, 전자현미경도 도입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미국의 주요 대학들에는 그의 논문이 소장돼 있다고 한다.

‘봉한학설’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가 순환하는 인체 기관을 실제로 발견했다는 내용이므로, 사실로 밝혀진다면 과학사의 엄청난 업적이 된다. 그러나 당시 해외의 학자들은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이 됐는지 김봉한의 소식도 묘연해졌다. 평양사범대학 노어과 교수였으며, 김정일의 스승이기도 했던 예일대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봉한은 ‘4층에서 뛰어내렸으나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세상에서 잊혀졌던 김봉한의 연구는 40여 년 뒤인 2002년 서울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소광섭 교수 연구팀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토끼의 몸 안에서 ‘봉한관’으로 추정되는 조직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2005년 미국의 해부학회지에도 발표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연구가 현재 의학계 바깥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소광섭 교수는 의학자가 아닌 물리학자다. 그래서인지 봉한관으로 추정되는 조직 사진을 제시해도 의학자들은 ‘림프관을 잘못 본 것’이라는 입장이다. 소 교수의 연구팀에는 국내외에서 온 수의학자·생물학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지만 서양의학 교육시스템을 거친 ‘의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주류 의학계에서 검증하면 되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지식과 첨단 장비면 이 연구의 타당성을 밝히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혹시라도 의학계가 품위를 생각해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닌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물론 봉한학설에 대해 섣부른 환상을 품어선 안 된다. 하지만 주류 의학계가 이를 객관적으로 검토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클라크의 법칙 두 번째는 “가능한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과감하게 살짝 들어가 보는 것”이라고 돼 있다.

박상준 오멜라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