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V자형 반등 ? … 꿈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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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은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대단한 소신파다. 재경부 차관 시절 386 실세들과 맞붙은 진동수 금융위원장의 뚝심도 알아준다. 이런 사람들이 요즘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 머뭇거리는 대목이 하나 있다. 감히 ‘신속한 구조조정’이란 단어를 못 꺼낸다. 이 대통령의 “내년에 우리 경제가 가장 빨리 회복할 것”이란 발언이 나온 뒤 생겨난 증상이다. 얼핏 보면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내년 4.2%의 성장 전망치를 소개한 간단한 사안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장·차관 워크숍과 한나라당 중진과의 모임에서 똑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대통령의 발언은 무게가 남다르다. 알아서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는 게 공무원의 생리다. 한 경제부처 간부는 “V자형 반등에는 대통령의 종교적 낙관론까지 묻어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마음이 V자형 반등으로 기울면 정책 입안자도 그쪽으로 주파수를 맞출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의 방향과 강도까지 달라지게 마련이다. 진짜 V자형 반등이 온다면 굳이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다. 잠시만 버티면 될 일이다. 당장 현안인 일자리 유지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금융당국과 은행은 160조원 규모의 중소기업 대출을 모두 만기 연장해 주기로 합의했다. 이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라고 칭찬했다. “기업을 죽이기보다 기업을 살리는 구조조정을 하겠다.” 요즘 진 금융위원장이 자주 하는 희한한 표현이다. 모두 대통령의 마음에 자리 잡은 V자형 반등론에서 파생된 정책이다. 정부가 왜 이런 쪽으로 가는지 이해는 간다. 당장 구조조정이 경제에 미칠 충격이 겁날지 모른다. 은행과 기업도 구조조정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정부마저 손 빼면 구조조정은 물 건너가게 돼 있다.

문제는 세계 경제의 향방이 안갯속이라는 사실이다. V자형으로 회복할지, U자형으로 갈지, 아니면 장기침체를 의미하는 L자형으로 고착화될지 누구도 모른다. 세계경제의 운명이 신(神)의 영역에 접어든 느낌이다. 이럴 때는 구조조정이 정석이다. 경쟁력을 가진 기업은 적극 지원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과감히 도태시켜야 경제위기의 장기화에 버틸 수 있다. 이미 전 세계가 과잉설비·과잉부채·과잉고용 등 3대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자동차 등에 구제금융을 쏟아부으며 버티기에 들어간 것도 나쁜 뉴스다. 글로벌 구조조정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될 소지가 커진 것이다. 복합 불황이 장기화하면 우리 혼자 용뺄 재간은 없다. 희미한 V자형 반등 가능성에 목매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전통적으로 구조조정의 가장 효과적 수단은 고금리다. 금리가 오르면 한계기업은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된다. 그러나 이미 초저금리가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판에 이자조차 못 갚는 기업이라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한계기업에 대한 동정심은 금물이다. 냉정하게 구조조정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면 결국 기업부실이 은행부실로 전염되고 나중에는 경제 시스템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대통령만큼 현장에 강한 사람은 많지 않다. 1년 전에 전봇대를 뽑아낸 대불공단만 봐도 알 수 있다. 9개의 전봇대가 2m씩 뒤로 물러나 차량 통행이 편해졌다. 대형 블록을 옮길 때마다 자르고 붙였던 전선들은 모두 지중화됐다. 요즘엔 당초 43.2t의 하중에 맞춰 설계된 교량을 500t까지 견딜 수 있게 보강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대불공단의 조선 협력업체에는 보다 큰 블록을 납품해 달라는 주문이 늘고 있다. 공단 관리사무소의 최규연 대리는 “대통령의 지적 이후 기반시설이 많이 좋아졌다”며 “현재 대불공단은 다른 공단에 비해 경기가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 지난 연말 새벽 이 대통령이 서울 가락시장의 노점상 할머니에게 목도리를 매준 것도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경제정책이 샛길로 빠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V자형 반등이 찾아온 외환위기 때는 과도한 다이어트가 부작용을 초래했지만, 지금은 L자형 장기침체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살을 빼야 한다. 다행히 새 경제팀은 구조조정 경험이 풍부하고 시장의 평가도 괜찮다. 이런 상황이라면 “장관들은 현장에 나가라”는 대통령의 주문을 거꾸로 바꾸면 어떨까 싶다. 대통령이 주로 현장을 다니는 것이다. 그동안 이 대통령의 리더십이 돋보이고 여론 지지도가 오른 것도 현장에서 명장면을 연출할 때였다. 정책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야 소신껏 칼을 휘두를 수 있다. 원래 칼잡이는 따로 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