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촌동네였던 강남을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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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재동 말죽거리의 1959년左과 2008년의 모습. 한강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쉬며 ‘말 죽을 먹이는 곳’이란 뜻에서 거리이름이 유래한 이 한가롭던 길은 강남 개발로 땅 투기의 대명사가 되어 ‘말죽거리 신화’란 말을 남겼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고가 아파트와 화려한 건물, 번쩍이는 쇼윈도로 상징되는 소비의 땅 강남.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문화가 지배하기 전, 강남은 인정 넘치던 시골마을이었다. 1966년 이후 불어닥친 개발 바람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흔적과 문화까지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은 서울 강남 원주민 13명의 증언을 채집하고 옛 사진을 기증받아 정리한 생활문화자료조사서 『강남 이야기로 보다』『강남 사진으로 보다』를 발간했다. 2008년 한 해 동안 콘크리트 더미 아래에 묻혀있는 ‘성형미인’ 강남의 맨얼굴을 찾아나선 결과물이다.

◆“강북 똥물 받아다 초식 지었지”=새말(신사동) 토박이 이완근(78)씨는 10대 시절 똥지게를 졌다. 강 건너 용산 일대 가구들의 똥물을 받아와 초식(야채)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인분을 쓰면 차미(참외) 수박 그런 거 있잖우? 그게 무척 달아요.” 강남 일대는 강 건너 서울 사람들의 야채 공급지였다. 똥 치우는 값(한 지게당 60원)도 벌고 거름도 만드는 재미에 하루 두번씩 배 타고 강을 건넜다.

잠원동은 일제강점기 대규모 뽕밭이 들어섰던 곳. 조선인은 일본인의 양잠농장에서 뽕잎을 따고 누에를 쳐 생활을 꾸렸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비단 제품 수출이 막히자 뽕나무를 뽑아내고 무밭을 만들어 단무지를 군납했다. 해방 후에도 이어지던 단무지 농사는 강남 개발로 막을 내렸다. 아파트촌으로 변신한 압구정 자리엔 원래 배나무 과수원이 많았다. 역말(도곡동)은 도라지 농사로 이름난 곳이었다.

◆“상부상조 정신 때문에 산 거지”=관혼상제는 온 마을 공동의 행사였다. 초상이 나면 창호지 한 권(20장)에 양초 한 갑씩 부조했다. 병주(막걸리 한 되), 팥죽 한 동이를 쑤어가기도 했다. 장례식날 상여를 메는 품앗이도 중요한 풍습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상여를 갖추지 못한 부락은 이웃 마을에서 빌려 썼다. 비닐이 없던 시절이라 상여에서 시체 썩은 물이 떨어지며 풍기는 악취가 심했다. 그래서 상여지기에겐 얼근하게 술을 먹였다.

“내 부모라 생각하고 품앗이로 하는 거지. 그걸 돈 받고 하는 거면 아무도 안 하지.” 동산말(잠원동) 출신인 문영준(79)씨는 “상부상조 정신 때문에 산 거지, 지금같이 각박하면 못 살았을 것”이라 회고한다. 강남이 경기도에서 서울시로 편입된 1963년 이후 교통이 좋아지면서 상여는 사라지고 영구차가 들어왔다.

역말은 2년에 한번 3일에 걸쳐 도당굿을 벌였다. 동네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집집마다 쌀이나 돈을 조금씩 추렴했다. 서초동 산저마을(꽃마을) 사람들은 환갑 잔치 며칠 전부터 꽃 장식을 함께 만들고, 잔치에 쓸 콩나물을 여러 집이 나눠 길렀다. 이제는 잊혀진 이웃사촌의 진면목이다.

조사를 맡은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강남에는 옛 사람들이 간직했던 소중하고 긍정적인 가치가 묻혀 있었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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