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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해외신용도 추락…대기업 잇단 부실화 여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시중은행에 이어 국책은행마저 해외차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국책은행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신용도에 버금가는 수준의 신용등급을 인정받아 왔다.

일종의 정부보증은행이라는 뜻에서다.

우려했던 대로 외국투자자들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국책은행의 신용등급은 기아사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난주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을 검토하겠다고 한데 이어 스탠더드&푸어스 (S&P) 도 한국의 신용전망을 '안정적' 에서 '네거티브' 로 바꾸자 곧바로 국책은행의 차입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전망의 변화만으로 갑자기 충격이 밀려온 것이다.

이는 외국기관들이 한국에 대한 투자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등급과 관계없이 전망만 조금 나빠져도 돈을 안 풀겠다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신용등급의 실질적 하락이 없는데도 마치 하락한 것과 같은 효과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무척 곤혹스럽다" 고 말했다.

실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신용등급을 받고 있는 아일랜드나 포르투갈의 금융기관들은 우리보다 평균 0.2%포인트 정도 싸게 돈을 빌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보사태 이후 대기업과 관련은행들의 잇따른 부실화로 어느새 '한국' 하면 '위험' 이라는 이미지가 투자자들 사이에 깊이 새겨지게 된 것이다.

사실 국제적으로도 한두번의 사고는 봐주는 것이 통례다.

94년말 영국 베어링스사가 13억5천만달러 규모의 외환사고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을 때도 국제투자자들은 영국 금융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기관의 문제로 분류해 국가신용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도 한보사태 하나만 터지고 말았다면 쉽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삼미.진로.대농.기아의 부실화가 이어지자 신용하락이 하나의 '추세' 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기업은행 국제금융실 관계자는 "요즘 국제자금시장에서 한국계 기관은 공식신용등급보다 한두 단계 낮은 대우를 받고 있다" 며 "특별한 호재 (好材)가 없는 한 이런 상황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고 말했다.

정부도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게 됐다.

한국은행이 12일 시중은행들에 10억달러의 외화자금을 지원한데 이어 재정경제원은 13일 제일은행에 대해 지원대책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제일은행 문제는 한국계 금융기관 전체의 문제로 비화할 것이 분명하므로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가 수수방관만 할 수 없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주 발표된 S&P보고서는 " (한국) 정부의 금융지원이 S&P가 상정하고 있는 '최악의 규모' 까지 달하게 된다면 앞으로 1년내 신용등급이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고 명시했다.

정부의 무조건적 지원이 능사 (能事) 는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정치상황.북한문제등 경제외적 변수가 늘 신용등급 조정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용등급의 상향조정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경제의 근본여건을 개선해 외국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길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금융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어떻든 정부의 응급대응이 불가피해졌다.

사실 그동안 정부는 기아와의 줄다리기가 맞물려 있어 부실은행 지원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게다가 특혜지원 시비가 이는 것을 꺼려 적극 개입을 삼가는 분위기였다.

강경식 (姜慶植) 부총리도 "한은특융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국민 돈을 그냥 주는 것인 만큼 특혜시비가 따른다" 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었다.

더구나 어떠한 지원책을 쓰더라도 특혜성이 있는 경우는 국회동의를 꼭 거치도록 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한은특융외의 방법은 정부가 금융기관의 증자를 돕는 것이다.

즉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으로 금융기관이 증자한 무의결권 우선주를 사들이는 방안이다.

이는 姜부총리가 직접 재경원 실무진에 검토를 지시할 정도로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방법이다.

무의결권 우선주를 매입하는 만큼 정부가 민간은행 경영에 참여하는 문제를 피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우선주 발행한도가 납입자본금의 50% 이내여서 지원규모에 제한이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이밖에 금융기관이 해외차입을 할 때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것도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지원들의 집행시기는 국회동의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고현곤.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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