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폼페이展'을 보고 … 김영나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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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서기 79년 8월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시와 그 주변은 용암과 화산재로 뒤덮혀버렸다.

그후 1천6백여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잿더미 밑에 뭍혀 잊혀진 폼페이의 시민과 건물, 그리고 벽화.조각들은 18세기에 처음 발굴되기 시작했다.

어느 소설보다도 더 극적인 바로 이 폼페이시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현재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전시중이다.

관람객들은 먼저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화산폭발을 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형체와 죽은 개의 형체를 대면하면서 충격을 받는다.

이것은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고안한 방법으로서, 발굴과정에서 단단히 굳어버린 화산재 속의 움푹 파진 곳에 석고액이나 합성수지를 주입하여 그 속에서 죽은 사람의 형체를 그대로 떠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번 전시는 순수미술보다 폼페이인들의 생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폼페이는 나폴리 근처에 있었던 상업도시로 화산폭발이라는 재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이름도 모를, 로마제국 초기의 아주 평범한 소도시였다.

당시 로마 귀족들 사이에는 전원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이 별장들은 폼페이보다는 조금 떨어진, 용암이 흘러들어 더 큰 피해를 입은 에르콜라노 (허큘레니움)에 더 많았다.

인구 2만의 폼페이는 중상층.상인.노예들이 섞여 생활하는 도시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곳의 생활용품들은 로마의 상류층들이 쓰던 것보다는 검소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번 전시에 보이는 화려한 장신구나 등 받침대, 음식보온용기, 청동화로, 은으로 만든 술잔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생활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고급스러웠는지를 말해준다.

벽화가 그려진 거실과 조각이 놓여진 정원이 있는 집에서 생활하면서 냉탕.온탕을 번갈아 드나들고, 또 그럴만한 여유가 없으면 인구 30명당 하나 정도 있었다는 술집을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 폼페이인들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이번에 온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화들이다.

대부분의 고대회화가 없어진 상황에서 폼페이는 우리가 고대회화의 융성함을 짐작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로마인들은 실용적이고 조직적이긴 했지만 미술에서만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월함을 인정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로마의 조각이나 회화는 그리스 양식을 모사하거나 추종하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조각과 회화 작품에서 로마시대 미술뿐 아니라 그리스시대의 양식을 유추할 수 있는 것도 이런한 이유에서다.

간혹 이러한 고대문명이나 유명화가들의 전시가 과장 광고되어 실제 가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 폼페이 전시는 전시된 유물에 걸맞게 디스플레이에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 인상적이다.

전시품목의 수준, 전시효과,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의 카로 박사의 자세하고 학구적인 글 등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정말 가볼만한 전시다.

김영나 [서울대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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