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소통이 아니면 설득이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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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조대왕 어찰 발견 소식에 우리 대통령 가슴이 철렁했을지 모르겠다. 인간미 물씬 풍기며 고뇌하는 군주의 모습에, 바다 건너 오바마에 이어 지난 역사 속에서까지 또 하나의 ‘엄친아’가 더해질까 겁나서 말이다. 하지만 기죽을 것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어찰에 빗대 쓰여진 이런저런 글들에 또 하나를 보태는 건 그걸 설명하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 편지의 교훈을 ‘소통’으로 읽는다. 대화는 없고 주장만 있는 현실 정치에 지친 탓이다. 그런데 임금이 정치적 반대파의 영수와 비밀 서신을-그것도 수백 통이나-주고받았다니 멋지지 않은가. 때론 분노하고 때론 감싸며 때론 함께 책략을 꾸미기도 한다. 반대파까지 포용하는 대화의 정치다. 반대당은커녕 같은 당내 라이벌끼리도 등을 돌리는 멋없는 요즘 정치와 다르니 열광하는 거다.

 막후가 아니더라도 정조는 늘 소통하고자 했다. 특히 간관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가감없이 지적할 것을 요구했다. “언로(言路)는 국가의 혈맥이니 말을 듣는 것이 임금의 급선무요, 말을 하는 것은 정신(廷臣)이 힘써야 할 일이다.“(정조실록 1776), “광필(匡弼·잘못을 바로잡아 보필함)의 책임이 있는 신하들은 내 잘잘못에 직언해 달라.”(1779), “각각 바른 말을 꺼리지 말아 크면 천만언(千萬言), 적어도 열 가지는 아뢰어 부족한 나를 도와야 한다.”(1784)

감언을 물리치고 고언을 새길 줄도 알았다. 왕의 실정(失政)을 꼬집는 상소를 올린 정언(正言) 한후익을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아우성을 “말꼬리를 잡는 건 조정에서 할 일이 아니다”며 일축한다. 행부사직 신상권이 다시 한후익을 성토하며 왕을 찬양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런 자를 죄주지 않으면 임금이 스스로 성인인 양 하는 폐단이 생긴다”며 관직을 삭탈했다.

이런 반듯한 왕이니 엄친아 얘기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정조식(式) 소통이 늘 쌍방향이었던 건 아니다. 서찰에서도 드러났듯 일방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선언한다. “예부터 임금들이 자신과 관계된 사건이면 혐의쩍게 여겨 불문에 부치는 걸 너그러운 도량으로 생각해 의리(義理)가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정조행장)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적들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얘기다. 홍인한·정후겸을 유배시키고 화완옹주를 폐서인하는 조치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정조식 일방 정치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명목상 역대 제왕의 글을 보관하기 위한 기관이지만 실제로는 반대파를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갈수록 권력화해 정조 6년 공조참의 이택징이 “규장각은 전하의 사각(私閣)이요, 각신들은 사신(私臣)”이라고 모집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정조도 그걸 부인하지 못했다.

 보복과 측근 중심의 일방 정치, 한마디로 현대정치에는 발 못 붙일 구태였던 것이다. 기죽을 필요 없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게 있다. 기가 좀 살았어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불만이 들끓자 정조는 신하들에게 규장각을 세운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뿌리 깊은 음해 세력 탓에 믿을 만한 신하를 찾기 어려웠음을 고백하고, 사대부의 게으름을 질타하며, 맹자를 인용해 측근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측근이라고 특혜를 베풀지 않았음을 해명하며, 차차 기용의 폭을 넓혀갈 것을 약속한다. 봉건적 군신관계에서는 보기 어려운 설득의 정치다. 이런 군주 앞에 골수 적대파인 이택징조차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죄 받기를 청한다. 임금 또한 그를 용서한다.

설득의 힘이다. 이런 정조의 모습은 대통령도 닮을 필요가 있겠다. 사실 권력자가 남의 말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면 뭐하러 권력을 잡았나 싶을 터다. 이 말 저 말에 흔들리지 않는 소신도 덕목일 수 있다. 대신 그 소신을 반대파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전화도 있고, e-메일도 있고, 정조보다 훨씬 많은 설득의 도구를 갖지 않았나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분 차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