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신한국당 경선 돌풍 이인제 경기도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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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그날 그의 연설은 한줄기 사자후 (獅子吼) 였다.

'여기가 최후의 승부처' 라는 절박감 때문이었을까. 신 (神) 이 내린 듯 눈빛이 번득였고 목소리에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대는 비장함마저 담겨 있었다.

1만여 신한국당 대의원이 운집해 있던 지난 21일 신한국당 전당대회 결선 정견발표. 그를 지지하지 않는 대의원들도 '최고의 연설' 이라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러나 끝내 그의 '바람과 혁명' 은 좌절됐다.

조직과 세력이 힘을 써온 여당, 아니 한국정치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이인제 (李仁濟) 후보는 그렇게, 주인공의 자리 한발짝 앞에서 분루를 삼켰다.

그러나 그는 신한국당 대의원들의 철심 (鐵心) 40%를 자신에게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그의 무기는 젊음과 민심이었다.

젊음이 그의 창이었다면 민심은 그의 방패였다.

젊음은 가능성이며 민심은 늘 진행형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가 자신의 패배를 '미완의 혁명' 이 아니라 '진행중인 혁명' 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다.

7월의 땡볕보다 더 뜨거웠던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내내 '주연보다 찬란했던 조연' 이인제 경기지사, 대단원의 막이 내린 뒤의 그를 만났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호텔 인터뷰 룸을 들어서는 李지사의 얼굴엔 아직 '격전' 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쉬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만족은 안하지만 결과엔 승복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미련도 없습니다.

잊을 건 빨리 잊어야죠. "

- 경선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흑색선전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저에 대한 모략으로 가득찬 모 주간신문이 대의원들 집에 일일이 배달됐습니다.

누군가 고의로, 그것도 조직적으로 배포했다는 얘긴데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참 서글펐습니다. "

-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 이랬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점 몇가지만 말씀해주시죠.

"글쎄요. 지난 얘기를 하는 게 내키지 않습니다만…. 굳이 든다면 제도에 문제가 있었고 전략적으로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우선 대의원 구성이 잘못됐어요. 위원장의 입김을 줄이고 자유투표를 보장하려면 대의원 수가 최소 5만명은 됐어야 합니다.

또 연령별.성별.지구당 인구비례로 대의원을 선정해야 정확히 민심을 반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경선규정 개정때부터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민심을 얻고 국민 지지를 끌어내면 영입파에 눌려 지내던 민주계의 전폭 지원이 있을 것이란 전략을 세운 것도 착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주계 지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뛰었더라면 더 나을 뻔 했어요. 경선 막판 박찬종 후보가 제기한 금품살포 의혹도 마이너스 요인이 됐습니다.

경선의 흐름을 바꿔 놓은 거죠. 대의원 혁명.세대교체가 이슈가 됐어야 했는데 그만 금품살포 공방으로 틀어졌죠. 경선 당일날도 5표차로 극적인 2위가 된 뒤 결선투표를 바로 했으면 4인 연대의 위력을 보다 강력히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재검표로 인해 무산됐습니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아쉬운 법, 얘기하라니까 두서없이 말했지만 이미 다 잊었습니다. "

- 4인 연대의 향후 행보가 궁금합니다.

항간에는 4인 연대를 축으로 한 비주류 연합설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경선을 위한 연대였습니다.

각자 정치적 입장과 지향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4인연대의 비주류 연합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당내 역학관계는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

-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우선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이 급속도로 힘을 상실함으로써 당내 지도력 공백상태가 올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리더십이 당내에 자리잡으려면 상당한 조정기간이 필요합니다.

지도력이란게 어느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니까요. 그 과정에서 당내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갈등을 없애려면 화합이 중요합니다.

화합은 각자에게 맞는 역할이 주어지고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생깁니다.

따라서 더 이상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존재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누구든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센 반발에 부딪쳐 좌절을 맛보게 될 겁니다.

시대가 그런 발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런 권위주의적 시도가 있다면 이를 분쇄하는데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작정입니다. "

신한국당의 앞날에 대해 화제가 옮겨가자 李지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신한국당이 빠른 시간내에 국민의 에너지를 모아 당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상향식 민주정당' 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며 인터뷰 내내 이를 강조했다.

"연초 한보사태가 터진후 근 6개월간 신한국당은 최악의 국민지지도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경선 한달새 국민회의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국민지지도 1위정당으로 올라섰습니다.

경선이 그만큼 드라마틱했던 것도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대선까지는 앞으로 네달 이상 남았습니다.

한달만에 지지도 1위로 올라섰다면 네달 뒤엔 어떤 변화가 있을지 누구도 안심 못합니다.

대기업이 속수무책으로 줄줄이 도산하는 등 경제가 불안하고 외교.안보 상황도 심상치 않습니다.

많은 변수가 남아 있다는 말이죠. 단기간 국민지지율이 좀 올랐다고 자만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민심은 늘 진행형입니다.

민심의 추이를 제대로 읽고 따르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됩니다.

신한국당이 빠른 시간내에 상향식 민주정당으로 환골탈태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결과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

- 경선 후보의 탈당설등 정계개편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정치에는 청산해야 할 낡은 질서와 가치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갈등구조를 낳습니다.

이를 뿌리뽑지 못하면 정계 대폭발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지역주의가 대표적인 예죠. 이번 경선에서도 그런 징후가 나타났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역주의가 다시 힘을 얻어 정국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건 국가적 불행입니다.

또 보수안정 세력과 개혁진보 세력이 맞부딪치고 근대화.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간 갈등과 대립 기류가 분명 존재합니다.

이것들을 비등점에 오르게 놓아두면 당연히 폭발합니다.

냉전시대의 낡은 가치를 고집하면서 서로 갈등.대립하다간 정치공백을 맞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원심력을 차단하고 구심력을 키워야 합니다.

비전과 정책이 있는 정당, 화합과 개혁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게을리하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

- 신한국당에서 제4의 후보, 즉 영남후보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예상도 있는데요?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난 23일 대통령과 점심을 했습니다.

대통령도 이 문제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하셨습니다. "

- 신한국당의 정권 재창출이 무난히 달성되리라 보십니까?

"낙관은 금물입니다.

국내 정치상황은 워낙 변수가 많습니다.

제대로 정책.비전을 세우고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국민정당이 돼야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한국당이 국민정당으로 살아남으려면 개혁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당내 개혁의 주체였던 김대통령과 민주계의 생명력 유지가 어려워진 상황입니다.

기득권 의식을 버리고 서비스 정당으로 변모하는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

- 경선을 통해 입지가 강화된 李지사의 선택이 당내 세력구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관측이 유력합니다만?

"당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선택운운 한다든지, 누구편에 서거나 안서거나 하는 것등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입장도 아닙니다."

- 차기정권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경제.사회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최선의 역할을 다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국민의 뜻을 읽는 일만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늘 바른 위치에 설 수 있다고 봅니다. "

- 결선투표후 부인 김은숙씨가 눈물을 흘렸다는데….

"그렇잖아도 대통령께서 집사람을 특별히 위로해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저도 울고 싶은 것을 용케 참았습니다.

정치입문후 첫 패배라서 더했는지도 모르죠. 언제나 불리하다, 불가능하다는 세평을 뒤집고 이겨왔습니다.

88년 국회의원 선거도 95년 도지사 선거 때도 그랬습니다.

아내를 같은 이유로 두번 울게 하지 않으렵니다. " - 김여사는 남편으로서 李지사에게 90점을 줬습니다.

아내에게 점수를 준다면 몇점쯤?

"아내가 제게 90점이나 줬다면 그보다는 더 줘야겠지요. 95점쯤. 아내와는 논산중학교 시절 만났습니다.

제게는 정치적 동지나 다름없죠. 사실 아내는 헌신밖에 모르는 여성입니다.

그게 좀 적극적이라 가끔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지만 (웃음) .언론에선 제가 '절반의 승리' 를 거뒀다고 합니다만 아내가 없었더라면 그것도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이 우리 두 사람의 손과 발과 입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

- 10년뒤 자화상을 그려본다면?

" (한참을 생각한 뒤) 질문 의도는 알겠지만 저는 대통령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을 좋아합니다.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삽니다.

6년전 75세때도 어머님은 인삼밭에서 일하셨습니다.

일당 6천원을 받고. 돌아가신 아버님도 일흔이 넘어서도 늘 일하셨습니다.

그런 부모님들을 저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팔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 끊임없이 일하는 것, 그게 10년 뒤든 20년 뒤든 변하지 않는 제 모습일 겁니다.

꼭 꼬집어 말한다면 10년 뒤엔 시기적으로 봐서 통일한국 건설에 동참하고 있겠지요. "

- 각종 여론조사에서 李지사에 대한 지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절대다수가 '젊다, 참신하다' 를 꼽았습니다.

"그만큼 변화에 대한 국민 열망이 높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치.사회.제도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정보화 사회입니다.

낡은 시스템과 가치.질서로는 새 세기의 도전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젊은 지도자의 출현은 세계적 흐름이고 역사의 필연입니다.

지지해 주신 국민들껜 기대에 보답하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

- 차세대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치는 역사와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길이 막히면 돌아갈 수는 있지만 방향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국민 편에 서고 그 뜻을 따르는 게 첫번째 방향입니다.

중앙무대에서 떨어져 있다가 이번에 2년만에 지구당 위원장들과 만나면서 어려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국민의 여망에 부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

-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휴가를 가고 싶습니다.

아내와 함께 훌훌 털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전부 풀어버리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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