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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열며]불매인과와 능동적 용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각 종교의 중요한 얼굴로 익혀져 온 종교계의 여러 원로들과 수백만명의 불교도들이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과 복권을 위해 서명했다는 소식이다.

전직 대통령들로부터 반평생을 핍박받으며 살아온 야당 총재도 '국민들이 원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전제로 "이제 전직 대통령들을 사면할 때가 됐다" 는 말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참으로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 사람들의 행 불행이 결정되는가.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그에 합당한 벌을 줄 수 있는가.

罰준다고 평화로워지나 불교는 예부터 인과응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죄를 지은 사람이 그 과보 (果報) 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이가 죄를 짓기는 했으되 뒤에 그것을 뉘우치고 도를 열심히 닦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도 과보를 받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나타난다.

어떤 선사는 '불락인과 (不落因果)' , 즉 "도를 이룬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고 잘못 말한 죄로 5백생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고 한다.

자업자득의 과보는 깨달은 이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른 대답은 '불매인과 (不昧因果)' , 즉 "인과응보의 세계에 살기는 하되 그것에 의해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는다" 는 것이다.

육신은 어쩔 수 없이 업 (業)에 의해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비천하고 짓밟히는 괴로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 때문에 불행해지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불매인과의 정신에 입각해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을 살피고 수행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나 아닌 다른 죄인을 벌하는 데는 난처하게 된다.

죄인은 우리가 벌을 주거나 말거나 자신의 업에 의해 과보를 받게 될 것이요, 그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다운 삶의 의미를 터득했다면 우리가 아무리 그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더라도 그는 그때문에 불행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해 낱낱이 벌을 주는 것은 너무도 피곤한 일이다.

거리에 나가 보면 공공질서를 어기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신문.방송을 보면 통탄할 만큼 가증스럽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타난다.

만약 우리가 저들의 죄를 낱낱이 가려 벌을 준 다음에야 속이 풀리고 편안해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평화로워질 수 없다.

인간의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느냐는 것,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인이 그렇게 믿겠느냐는 것, 이 두가지가 다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죄업을 짓는 사람이 끊임없이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것등의 난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을 위주로 살지 말고 나를 위주로 살아야 한다.

죄인을 벌주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평화롭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건가.

예수.공자.석가의 공통된 가르침을 따르자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것" 이 아니겠는가.

단지 5.18에 광주에서 죽은 원혼들, 삼청교육대에서 당한 원혼들, 그밖의 다른 원혼들에게 미안해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할 뿐이다.

용서만이 평화에의 길 슬픔을 잊고 분이 풀릴 시간이 필요한가.

그러면 망각으로 이 매듭을 풀자는 말인가.

망각은 너무도 비겁하다.

도망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월에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몰리는 것이 된다.

잊혀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살리면서 저 죄인들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의 멋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아니다.

저들부터 용서할 일이 아니다.

내가 먼저다.

'용의 눈물' 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은 이방원을 은근히 지원하는 나, 과거의 군사독재에 대해 방치.묵인 또는 협조함으로써 한 부역꾼이었던 나, 이제 와서도 그 시대에 대해 야릇한 향수를 갖는 나부터 용서해야 한다.

釋之鳴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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