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부도기업처리 정부 나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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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기업 부도가 연달아 터지면서 규제 많은 우리나라 경제의 시스템상 결함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성.한보 등 이미 제3자 매각이 결정된 기업들의 처리를 '책임' 질 기구가 없다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공정거래법.증권거래법.세법.금융제도 등은 이러한 처리가 자유경쟁시장에서 이뤄질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해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른바 주거래은행도 단지 상업기관에 불과하므로 이런 법률과 규정의 구속 아래서는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너무도 제한돼 있다.

우성.한보의 매각절차가 원점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도기업처리는 정부가 맡을 수밖에 없다.

강경식 (姜慶植) 부총리는 이번 기아그룹의 부도유예사태와 관련해 민간기업의 문제를 정부가 맡지는 않겠다고 언급함으로써 종전의 태도를 고수했다.

자유시장경제원칙에 철저히 입각한 정부당국의 입장표명으로 해석되기보다 절박한 경제위기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 경제의 고비용구조와 상품의 국제경쟁력 열위 (劣位) , 그리고 기업재무구조의 극심한 취약, 은행제도와 경영의 후진성이라는 현실에서 본다면 부도기업의 발생은 기아그룹으로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사업기업의 부도가 계속되면 필경 이는 금융기업의 파산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러다가는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을 포괄하는 한국경제 전부가 파국을 맞게 된다.

정부는 시급히 책임 있는 '부도기업처리기구' 를 구성해야 할 시점에 있다.

현실적으로 이 기구의 최고책임자는 재정경제원장관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적시 (適時)에 개별기업에 대해 회생방안을 결정.시행해야 한다.

정부자금에 의한 융자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새 주주및 새 경영자에게 부도회사를 넘기는 것도 회생방안에 포함된다.

장기적으로 이 기구는 시장을 통한 기업의 매수합병 (M&A) 이 더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법률.제도를 고치는 일도 맡아야 한다.

어차피 한국경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격랑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다발하는 대기업 부도에서 아직 위기를 깨닫지 못하거나 깨닫고도 아무 조처도 취하지 못하겠다는 정부라면 과연 그 존재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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