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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환희와 창조주의 타락을 그린 상상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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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06면

1 거대한 붉은 용과 태양을 입은 여인(1805) ,펜과 수채, 34.3x42㎝, 브루클린 미술관, 뉴욕2 영화 ‘레드 드래곤’(2002)의 한 장면 3 태고의 나날들(1794/1824/1827), 펜과 수채, 23.2x17㎝, 맨체스터대 휘트워스 갤러리

이상심리자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은 이제 단지 할리우드 범죄 스릴러 영화의 소재를 넘어 국내 신문·방송을 몇 년에 한 번꼴로 뒤흔드는 현실이 돼 버렸다. 최근의 경기 서남부 사건도 그런 경우인데, 이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데 쓰인 ‘크리미널 프로파일링(범죄 심리분석)’ 기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로파일링은 ‘양들의 침묵’(1991)과 ‘레드 드래곤’(2002) 같은 한니발 시리즈 영화 덕분에 대중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수사 기법이다. 영화들 속에서는 FBI 요원들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천재적 연쇄살인범 한니발 렉터와 심리 게임을 벌이면서 그의 통찰력을 빌려 또 다른 연쇄살인범들의 심리를 분석해 추적해 간다.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이 중 ‘레드 드래곤’은 ‘양들의 침묵’보다 10년쯤 뒤에 나왔지만, 사실 토머스 해리스의 원작 소설 시리즈에서는 ‘양들의 침묵’보다 먼저 나왔고 한니발이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라서 그만의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의 또 하나 매력은 원작 소설과 영화 전체에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면서 아예 그 제목까지 결정한 한 점의 그림, 200년이나 묵었으나 기묘하게 현대적인 작품 ‘거대한 붉은 용과 태양을 입은 여인’(도판1)일 것이다.

이 그림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은 일반적인 용의 모습 대신 인간과 파충류의 특성이 결합된 육체를 지니고 있다. 날개에는 강철 같은 힘줄이 뻗쳐져 있고 꼬리는 꿈틀거리며 잠재적 희생자로 보이는 여인을 감고 있어 기괴한 성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게다가 이 용은 화면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데, 그 감추어진 얼굴이 줄 수 있는 공포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앞모습보다 더더욱 위협이다.

영화 ‘레드 드래곤’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받은 학대와 기형적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성폭행과 살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달러하이드는 이 혐오스럽고도 매력적인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를 붉은 용이라고 칭하며 그림을 등에 문신으로 새기고(도판2) 본격적인 연쇄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 강렬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다. 그는 당시 독보적으로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을 추구하며, 자신의 시와 그림을 함께 동판에 새겨 채색 판화시로 찍어 내곤 했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였다. 저 악마적 환희에 넘치는 그림 ‘거대한 붉은 용’에서 볼 수 있듯이 블레이크는 혹시 악의 미에 경도된 유미주의 예술가는 아니었을까.

사실 그렇진 않다. 블레이크의 거의 모든 작품은 그가 “위대한 예술의 법전”이라고 한 신약·구약성서에 기반하고 있으며, 또한 청교도 문학의 거장 존 밀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붉은 용’ 또한 신약성서 중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 용은 (중략)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기가 그리스도라는 해석에는 이견이 없는 반면 태양을 입은 여인의 정체는 다소 모호해 성모 마리아, 이스라엘 민족, 그리스도교 교회로 각각 해석되기도 하고, 또는 그 모두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아무튼 영화 ‘레드 드래곤’의 비참한 희생자들과 달리 이 여인은 원래 붉은 용에게 희생되지 않으며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피신한다.

이렇게 블레이크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저 당시의 낡은 기독교 교리를 설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존 기독교 교리에서는 광기와 상상 등 이성적이지 않은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은 모두 악으로 간주한 반면 블레이크는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인간은 영혼에서 분리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미켈란젤로적인 강건하고 장엄한 근육을 지녀 육체적이면서도 영적인 것이다.

마침 지금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전(2월 14일까지)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아쉽게도 ‘거대한 붉은 용’ 연작은 없으나 블레이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태고의 나날들’(도판3)을 볼 수 있는데, 서울대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기쁨을 모르는 창조주는 분할 컴퍼스를 사용해 별들 사이의 공간을 측정하고 원천적 힘을 통제하고 있다.” 이 창조주는 블레이크의 시 ‘유리즌(Urizen)의 서’에서 유리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비록 창조주이지만 상상력을 잃고 이성에 경도됨으로써 이 세계를 창조 순간부터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블레이크는 상상력을 중시했으며, 그의 상상력과 비전을 이용해 빛의 천상과 암흑의 심연을 모두 탐구하며 그 균형과 인간의 구원을 연구했다. 아마 그러한 심연에 대한 통찰이, 기존 종교화의 피상적이고 비루한 사탄의 모습과 달리, 무서운 박력과 관능미 넘치는 ‘거대한 붉은 용’의 사탄의 모습을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
블레이크의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현대 프로파일러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범죄자를 잡기 위해 범죄자의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하는, 그렇게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니체의 경고처럼 “심연도 너를 들여다보게” 되지 않도록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 가며 고군분투하는 프로파일러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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