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봉고차 때문에 거리 나앉을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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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할아버지, 요즘 어려운 경제 문제 때문에 많이 힘이 드시죠? (중략) 저는 대통령이 되어서 이 나라의 기둥이 되고 웃음과 꿈을 주는 여자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중략) 엄마는 52살이라 직장에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원룸 주인께서 2월까지만 살고 집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엄마는 직장 문제와 집 문제 때문에 날마다 우십니다. 우리 엄마를 좀 도와 주세요. 4학년 때 전교 1등 해서 은혜 보답하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수신인이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 귀하’로 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인천 남동구의 원룸 지하에서 엄마 김옥례씨와 단둘이 살고 있는 김모(10)양이 보낸 편지였다. 엄마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은 뒤 집세를 못내 지하 원룸에서 쫓겨나게 됐으니 도와 달라는 사연이었다. 김양은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다”며 “반찬 살 돈이 없어 교회에서 점심·저녁을 먹고 집에 온다”고 썼다.

이 대통령은 5일 경기도 안양 보건복지 129 콜센터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며 이 편지를 소개했다. 김양 모녀 사례를 들며 “신빈곤층 사각지대가 많다. 이런 가정은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양이 대통령에게 도움을 호소한 이유는 이렇다. 어머니 김씨는 2003년 전북에서 인천으로 왔다. 건설 일용직과 식당 일로 생계를 이어오다 요즘은 일거리가 없어 신빈곤층으로 전락했다. 김씨는 소득과 재산이 없다. 10㎡(3평)짜리 지하 원룸의 월세(22만원)가 6개월 치, 전기·가스 요금은 4개월 치가 밀려 있다. 23일까지 집을 비워야 한다.

사정이 급한 김씨가 주민센터에 도움을 청했지만 낡은 봉고차(그레이스 승합차) 한 대가 발목을 잡았다. 봉고차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된 것이다. 생업용이 아닌 봉고차를 갖고 있으면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김씨는 “차 한 대 때문에 복지혜택을 못 받는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정말 막막했다”며 “법이 그렇다니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 차는 지난해 3월 교회에서 “장사나 해보라”며 준 차였다. 그 차로 뻥튀기 장사를 하려 했으나 400만~500만원 하는 장비를 마련할 수 없어 포기했다. 김씨는 5일 이 차를 서둘러 75만원에 팔았지만 지원을 받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한림대 석재은(사회복지학) 교수는 “차가 있으면 무조건 기초수급 대상자가 안 된다는 말인데 시대가 달라진 만큼 수급자 선정 기준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신빈곤층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지원을 못 받는 사각지대가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긴급지원 대상자 선정 기준을 완화했지만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직된 제도 때문에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300만 명(추정치)이 넘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부양의무자 기준이다. 자식 가정(4인 가구)의 소득이 월236만원이 넘으면 부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없다. 그럴 경우 자식이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요즘은 불황 때문에 자식도 먹고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자식이 부양하지 않는데도 부양능력이 있다는 기준을 내세워 부모에게 지원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규정에만 얽매이는 행정 관행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기준대로 하지 않으면 감사원이나 행정안전부의 감사에 지적당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 그런 경우가 많았다.

안혜리·김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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