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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아들 친구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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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말도 탈도 많던 신사임당 화폐 5만원권이 드디어 나온단다.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던데 나는 새로 나올 화폐 덕에 영생하게 생겼다. 실제 인물 신사임당은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다. 결혼 후에도 친정에 남아 부모를 보살폈고, 남편이 첩을 들이는 것에 반대해 애들 다 놔두고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금강산에 들어가 자신을 수행하기도 했다. 자녀 교육도 특별했다기보다는 보통의 좋은 어머니 정도로만 그려져 있다. 남다른 면모라면 친정부모에 대한 깊은 정과 시대적 제약을 넘어 시와 서화 등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간 점이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볼 때 끊임없이 자기성찰과 노력을 통해 자기표현의 영역을 만들어 간 그녀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다.

이 말대로라면 여성운동 하는 단체에서 대환영할 일이지 왜 욕을 몇 사발씩 먹어 가며 ‘신사임당 화폐 인물 선정’에 반대를 했을까? 우리가 비판했던 대상은 실존의 신사임당이 아니고 후대에 만들어진 현모양처 이미지의 신사임당이다. 남편과 자식의 성공에 어머니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부각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역사 속에서 허구가 사실로 둔갑된 것이다. 결국 ‘율곡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위인으로 선정된 것이다. 요즘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부러움을 한몸에 사는 젊은이를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라고 한다는데, 신사임당은 거꾸로 조선시대판 ‘아들 친구 엄마’였던 셈이다. 화폐에 들어간 신사임당을 볼 때마다 주체적인 여성 대신 현모양처가 떠오른다면 화폐에 넣은 것은 바로 현모양처다. 돈에 그려진 그림과 상관없이 돈은 돈일 뿐이라고? 아니다. 화폐는 그 도안을 통해 각 나라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 바로 그 돈이 우리의 의식을 바꾼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물론 좋은 어머니, 좋은 부인은 인간이면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러나 남성처럼 여성 위인 선정도 그 기본 덕목 말고도 세종이나 율곡과 같이 무엇을 이루어 놓았나를, 남편과 자식만을 위해서보다는 타인이나 사회에 무엇을 공헌했느냐를 따져서 선정함이 옳다고 본다. 선정 이유에 예술가인 면도 고려했다지만 미술사적으로는 나혜석이, 문학사적으로는 허난설헌이 예술적인 공헌도에서 앞선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존재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은 어머니로서가 아닌 당당한 주체적인 여성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싶어 한다.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이미 둘이 벌어야 먹고사는 사회가 되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요해 온, 그리고 여성 스스로도 가지고 있던 현모양처에 대한 강박관념이 기혼 여성들의 낮은 취업과 높은 이직률은 물론이고 높아지는 비혼율과 저출산 현상을 만들어 놓았다.

결혼하면 ‘남편 출세하도록 뒷바라지’해야 하고, 애 낳으면 ‘영재교육에 능해져야’ 하니 결혼도 안 하고 애 낳기도 꺼리지 않겠는가? 애 낳으라고 출산비용 몇 푼 대주거나 구색 맞추기용 탁아소 몇 개 만들면 무슨 소용이랴? 사회가 여성들에게 현모양처만을 여성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고 부추기는 한 출산보조금이나 탁아소나 다 예산 낭비다. 여성들이 5만원권을 볼 때마다 “애 낳기 싫다”고 하면 어쩔거나?

이런 이유로 반대를 했었다. 하지만 선정되었고 곧 발행된단다. 선정한 후에 알아보니 실제 인물은 현모양처보다는 위대한 예술가인 면이 많아 이제부터 재해석도 한단다. 우리는 재해석한 다음에 선정해야 옳은 순서라 했다. 정부에서 하는 일 발목 잡지 말라 했다. 좋다. 지금 다들 살기 힘든데 발목 잡지 않겠다. 하지만 제발 뒷걸음질이나 하지 마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기 표현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면서 나름대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신사임당의 본모습을 찾아주자. 그것이 강릉에 누워 계시는 그분을 위한 우리의 도리이기도 하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바로잡습니다▒

신사임당이 누워 있는 곳(묘소)은 강릉이 아니라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이기에 바로잡습니다. 강릉(오죽헌)은 신사임당이 태어나 자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