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에세이] 용의자 사진 자주 크게 싣는 프랑스 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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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프랑스에서는 2006년 성폭행 용의자의 얼굴 사진과 범행 내용이 몇몇 지상파 TV에 동시에 방송됐다. 덕분에 경찰이 용의자를 바로 붙잡을 수 있었지만 인권 문제가 논란이 됐다. 마침 그 몇 년 전 우트로 사건이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뒤라 더욱 그랬다. 우트로 사건은 프랑스 북부 우트로에서 어린이 성추행 혐의로 10여 명의 마을 어른들이 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나중에 잘못된 수사와 재판인 것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한 피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이후 피의자 인권 보호 강화 움직임이 일던 터에 2006년 용의자의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자 개인 정보 공개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그러나 “중대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 용의자나 피의자 인권 보호보다 뒤처질 수 없다”는 주장이 우세해 방송 보도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2007년 여름에도 어린이 상습 성추행범을 이 같은 방법으로 당일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 신문에는 용의자·피의자·피고인의 사진이 자주, 아주 크게 실린다. 지난해 소시에테 제네랄에 무려 9조원에 달하는 손실을 안긴 트레이더의 사진도 사건 직후 공개됐다. 그는 구속 뒤 보석이 받아들여져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용의자-피의자-피고인의 모든 단계에서 사생활까지 낱낱이 공개됐다. 서울 서래마을 냉동 영아 사건의 피의자는 프랑스 신문이 예전의 가족 여행 사진까지 실었다.

프랑스가 우트로 사건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중대 범죄 피의자를 공개하는 이유에 대해 프랑스 법조계와 언론계는 ‘공인 이론’을 든다. 공인의 범주에는 사회 지도층이나 유명 연예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해당 피의자의 범죄 사실이 유력한 경우 그때부터 그를 공인으로 보고 초상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프랑스 수사기관이 통상 피의 사실을 공표하지 않다가도, 중대 범죄의 경우 수사 과정에 브리핑을 통해 언론에 알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흉악범의 경우 신원 공개가 여죄 수사의 단초가 될 수도 있고,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으킨다는 취지도 담겨 있다.

연쇄 살인범 강호순의 얼굴 공개를 놓고 우리나라에서도 피의자 인권 보호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피의자 인권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프랑스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또 강호순의 얼굴 공개는 사회적 보복이 아니라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정당한 알 권리 충족 차원으로 봐야 옳을 것 같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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