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左)이 일본에 간 직후 장훈(右)과 찍은 사진.
당시엔 재일동포 고교선발팀이 매년 한국에 와서 친선경기를 했다. 한국과 일본의 야구실력 격차가 클 때였다. 모두가 참패했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경동고가 3-3으로 비겼다. 서울운동장에 꽉 들어찬 관중(공식집계로 2만5000명)이 일제히 일어나 “다시 붙어서 승부를 가려라”고 소리를 질렀다. 예정에도 없던 재경기가 벌어졌다. 재경기에서 백인천이 투런 홈런을 날려 경동고가 4-2로 이겼다.
그 경기를 관심있게 지켜봤던 한 재일동포가 경동고를 일본으로 초청했다. 대표팀이 해외 원정가기도 어려운 시절에 단일팀이, 그것도 고교팀이 일본 원정을 간다는 사실 자체가 큰 뉴스였다. 경동고는 일본의 쟁쟁한 팀들을 상대로 3승3무2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돌아왔다. ‘발도 빠른 거물 포수’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에 프로선수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농협으로 간 백인천은 62년 1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에서 맹활약, 그 해에 기어코 일본에 진출했다. 직접 비교할 순 없지만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갔을 때보다 더 큰 화제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61년 내각수반 의전비서관이 되면서부터 경동고 야구부 후원회장을 맡았다. 첫 일본 프로선수가 된 백인천을 환송하는 축하연을 베풀었다. 장소는 청량리에 있던 형제주점이라는 추어탕 집이었다. 당시 3학년인 김충남(연세대와 국가대표 코치 역임)의 형이 경영하던 음식점이다.
일본에 가서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던 백인천은 75년 퍼시픽리그 타격왕(타율 0.319)에 오르며 전성기를 누렸다.
한국 프로야구가 생긴 82년,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으로 귀국한 그는 여의도에 있는 나의 집까지 찾아와 귀국인사를 했다. 그 해에 유일한 4할 타율(0.412)을 기록한 백인천은 90년 LG 우승 감독에 이어 96년에는 삼성 감독을 맡아 이승엽을 홈런타자로 조련했다. 그 역시 야구 외길 인생을 통해 나라의 이름을 빛낸 사람이다.
김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