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인 되고 싶다” 100만여 인파 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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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右)이 20일(현지시간) 4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마친 버락 오바마 신임 대통령을 포옹하며 축하하고 있다. [워싱턴 AFP=연합뉴스]

 “훗날 내 아이들에게 오바마의 취임 비디오를 보여 주면서 그날 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20일 오전 10시30분(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전철의 끝 비엔나시에서 두 시간여 걸려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찾은 30대 남성 모사데이는 “추운 날씨인데 어떻게 나왔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와 같이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오바마 취임식장을 찾은 미국인들의 수는 100만 명을 넘었다.

이날 취임식장으로 통하는 길은 이른 새벽 모두 폐쇄됐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전철은 밀려드는 인파를 견디지 못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전철에서 나온 사람들이 앞다퉈 의사당으로 몰려들었다. 백인과 흑인, 청소년과 노인들이 뒤섞여 한길을 향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다니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1963년 1월 19일 마틴 루서 킹이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말하며 바라봤을 워싱턴 모뉴먼트 주변에는 그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들의 손엔 성조기가 들려 있었다.

매서운 추위 탓에 다소 움츠러들었던 분위기는 오전 11시 정각 행사장 주변 대형 스크린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을 떠나는 오바마 당선인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달라졌다. 청중은 일제히 “오바마” “오바마”를 외쳐댔다.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순으로 전직 대통령들이 입장하고 조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에 이어 오전 11시40분 오바마가 의사당 단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청중의 환호는 더욱 커졌다. 곳곳에선 성조기 물결이 넘실거렸다.

어려운 경제 상황의 극복 의지를 담아 “예스 위 캔(Yes, We Can)”을 외쳐대는 미국인도 많았다.

릭 워런 목사의 기도와 저명한 연주자인 요요마(첼로)·이작 펄만(바이올린) 등의 축하 연주 뒤에 오바마 당선인의 취임선서가 이어지면서 취임식은 절정에 달했다.

낮 12시4분. 단상 앞으로 나와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마주 선 오바마 당선인은 부인 미셸이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링컨이 사용했던 성경에 왼손을 얹고 오른손을 들어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헌법을 수호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고 선서했다. 미 해군군악대는 대통령에게만 헌사하는 ‘헤일 투 더 치프(Hail to the Chief)’를 연주했고 21발의 예포가 울려 퍼졌다. 청중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고 환호성을 울리며,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했다.

오바마는 이어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연단에 서서 18분간 ‘새로운 책임의 시대’를 주제로 취임연설을 했다.

그가 힘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미래의 세대에게 자유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기 위해 전진해 나갔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청중은 그가 연설을 마칠 때까지 10차례 박수로 화답했다. 취임식이 종료된 뒤에도 워싱턴 시내는 오바마의 퍼레이드를 보려는 사람들이 오후 늦게까지 거대한 물결처럼 움직였다.

연방 정부기관에서 일한다는 60대 흑인 어니스트는 “퇴임 때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공로에 대한 감사편지를 받기 위해 퇴직을 1년 늦췄다”고 말했다. 50대 백인 여성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에 쏟아 부은 돈이 도대체 얼마인가. 어려운 시기에 부시 정부가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선 데 대해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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