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재개발 참사 현장] “물려줄 것 없어 미안하다던 아버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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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에 마련된 임시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서울 용산의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불에 탄 건물의 유리창은 죄다 깨져 뼈대만 남아 있었다. 건물 주위엔 유리 파편이 돌덩이·골프공과 함께 뒹굴었다. 어지럽게 얽힌 전깃줄엔 물대포에서 뿜어져 나왔던 물이 고드름이 돼 걸려 있었다.

용산에서 삼호복집을 운영하던 양회성(56)씨는 이날 진압과정에서 숨졌다. 경찰로부터 부친의 사망 사실을 통보받은 아들 양종원(30)씨는 분향소가 마련된 순천향대병원을 찾아와 오열했다.

종원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11일 아들에게 “술 한잔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소주를 들이켜며 “물려줄 것도 없는데, 걱정만 시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철거가 진행되면서 아버지는 두 달간 장사를 못했다. 보상에 대한 합의도 미뤄지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종원씨는 “세 들어 장사를 하셨지만 평생 당신의 직업을 지키고 싶어하셨다”고 말했다.

양씨는 30년간 복집을 운영했다. 서울 여의도에서 식당을 하다 4년 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원씨는 “아버지가 식당을 하며 삼촌들과 우리를 모두 교육시켰다”고 했다. 양씨의 아들 둘은 모두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두 아들 모두 강남 일식집에서 일하고 있다. 요리는 그들에게 가업이었다.

아버지와 따로 사는 아들 양씨는 “아버지와 술 한잔을 한 뒤 전화를 드린다고 생각만 하고 연락도 못 드렸다. 오늘 어머니가 전화해 ‘어디 있는지 확인이 안 된다’고 해 일을 접고 뛰어나왔다”고 했다. 경찰로부터 부친의 소식을 들은 뒤 아들은 아버지와의 마지막 술자리가 자꾸 떠올랐다고 밝혔다.

◆“울음바다 된 병원”=사건이 발생한 건물 주변은 하루 종일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다. 무너진 망루의 검게 탄 잔해는 건물 옥상 밖으로 비죽이 나와 있었다. 주변 상인들은 종일 삼삼오오 현장에 모여 웅성거렸다. 인근 편의점 주인 박모(39)씨는 “같이 장사하던 사람들도 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심란해 장사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아귀찜 가게를 하는 박명서(64)씨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용역 직원을 고용할 돈을 세입자에게 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관계자들은 현장 주변에 배치된 경찰관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항의했다.

부상자가 실려간 병원 네 곳에선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날 오후 5시쯤 용산 중앙대병원 응급실에선 한 중년 여성의 통곡이 터져 나왔다. 망루에서 실종된 남편 이모(50)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직후였다. 그는 결국 실신했다.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도 부상자 가족들이 몰려와 울음을 터뜨렸다. 한 20대 여성은 어머니로 보이는 50대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가 불길을 피해 내려오다 빌딩에서 떨어졌다고 들었다”며 발을 굴렀다. 이 병원에는 화상을 입은 뒤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떨어진 지모(39)씨도 입원해 있었다. 부상 경찰관 5명이 입원했던 한강 성심병원도 부산했다. 낮 12시쯤 퇴원한 경찰특공대 소속 석영락(30)씨는 오른쪽 눈에 화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했다. 그는 “농성자들로부터 둔기로 다리를 여러 번 맞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7시부터 사건 현장 주변에선 전철연 주최로 촛불집회가 열렸다. 1000여 명의 시민은 촛불을 들고 “경찰이 무리하게 농성자들을 진압했다”는 취지의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전철연이 불탄 건물 앞에 마련한 임시분향소에 국화를 헌화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한쪽 차로를 가득 메우고 두 시간가량 경찰과 대치했다. 일부 시민들은 보도블록을 깨 경찰에 던졌다. 경찰은 살수차 두 대를 동원해 물대포로 해산을 시도했으나 500여 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명동으로 옮겨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에 던지는 등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을 벌였다. 

정선언·이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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