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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공룡’ 시대의 종언 … 몸집 줄이기 이어질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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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28면

“이제 때가 됐다. 변화를 선택하려고 한다.”

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이사 퇴장

로버트 루빈(71·사진) 씨티그룹 이사가 9일 최고경영자(CEO)인 비크램 팬디트에게 띄운 편지의 한 대목이다. ‘변화’란 우선 그가 이사와 고문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의 퇴진은 동시에 월가의 ‘금융 공룡’ 시대가 끝났음을 뜻한다. 한 지붕 아래 은행과 보험·증권·신용카드·자산운용·투자은행 등 금융의 전체 영역을 아우르는 게 ‘최고의 미덕’이던 시대가 저무는 것이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공룡들이 판치던) ‘금융 백악기’가 끝나고 있다”고 말했다.

루빈은 샌퍼드(샌디)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 존 리드 전 씨티그룹 공동 회장과 함께 그 시대의 개척자였고 씨티그룹의 ‘수퍼마켓’식 전략을 떠받친 세 기둥이었다. 그중 리드는 2000년에, 웨일은 2003년에 물러났다.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루빈마저 이번에 퇴진한 것이다. 루빈의 퇴진과 함께 씨티그룹의 분열도 본격화하고 있다. 씨티는 그날 바로 증권사인 스미스바니를 팔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CEO 팬디트는 16일 대대적인 분할 계획안을 내놓았다. 할부금융 등을 주로 해 온 씨티파이낸셜과 자산운용, 신용카드 부문 일부, 부실 모기지 자산, 보험회사 프리메리카 등을 묶어 씨티홀딩스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것이다. 금융 수퍼마켓의 핵심 부문인 보험과 자산운용 등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계획대로 매각이 끝나면 시중은행과 투자은행(IB) 부문만 남게 된다. 1990년대 후반 씨티그룹이 금융 공룡으로 몸집을 키운 지 10년 만에 다시 은행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3자 동맹’의 붕괴
98년 4월 6일 씨티은행과 보험그룹인 트래블러스가 합병을 선언했다. 웨일의 5주간에 걸친 적극적 구애에 리드가 감동받아 응한 모양새였다. 보름 뒤 열린 트래블러스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는 웨일의 구애가 “마치 수퍼모델을 유혹하는 듯했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웨일의 적극적 구애만으로 리드가 마음을 돌렸을까. 미 로체스터인스티튜트오브테크놀로지대(RIT) 로버트 매닝 교수는 ‘신용카드 제국’에서 “루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양쪽의 결합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닝 교수에 따르면 당시 재무장관이던 루빈이 씨티와 트래블러스 결합의 배후 조종자였다는 것이다. 루빈은 93년 이후 보험회사와 증권사 등을 사들여 금융 제국을 건설하고 있던 웨일의 야심에 대미를 장식해 줬다. 웨일이 씨티를 사들이겠다고 하자 루빈은 ‘굿 아이디어!’라며 무릎을 쳤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웨일과 리드를 재무부로 불러 “합병하면 적극적으로 돕겠다”며 망설이는 리드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매닝 교수는 이를 ‘3자 동맹’이라고 불렀다.

약속대로 루빈은 웨일과 리드가 합병을 선언한 뒤 적극적으로 의회를 설득했다. 씨티와 트래블러스 결합이 이뤄지려면 은행·증권 등의 겸업을 금지한 글래스-스티걸법을 개정해야 했다. 33년 제정된 이 법은 시중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도 금지했다. 웨일 등이 고용한 로비스트들이 워싱턴 의사당을 누비고 다니는 동안 루빈은 의원들을 만나 설득했다.

그 시절 루빈의 말은 천금 같았다. 재무장관 취임 첫해인 95년 멕시코 사태를 해결한 데 이어 97년에는 아시아 금융위기를 진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미 재무장관 가운데 파생상품을 직접 다뤄 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복잡한 현대 금융시장을 제대로 아는 인물로 꼽혔다.

루빈은 “금융시장 경계를 뛰어넘는 금융상품이 개발돼야 금융산업이 발전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금융회사가 시중은행과 보험·증권·자산운용 부문을 직접 거느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묵은 법(글래스-스티걸법) 때문에 금융회사들이 영국 런던 등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미 금융산업이 공동화되고 있다”며 애국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루빈 등 3인방의 노력은 성공했다. 이듬해인 99년 5월 의회는 ‘금융산업 현대화법’을 제정했다. 글래스-스티걸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금융산업 현대화법은 한 해 전 발표된 씨티-트래블러스 합병에 소급 적용됐다. 세계 최초의 금융 수퍼마켓, 씨티그룹은 이렇게 탄생했다. 다른 금융회사들도 씨티그룹의 뒤를 따랐다. 메릴린치 등 월스트리트 증권사들도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 부문을 다각화했다.

루빈은 두 달 뒤인 그해 7월 재무장관을 그만두고 씨티그룹 이사 겸 고문으로 들어갔다. 스톡옵션과 현금으로 해마다 1000만 달러 이상을 받는 조건이었다. 3자 동맹에 대한 보상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루빈의 퇴진과 씨티그룹의 분할·매각은 3자 동맹 체제의 해체를 의미한다.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위기가 월가의 금융 패러다임을 과거로 되돌려 놓고 있는 셈이다.

금융그룹 해체 도미노
루빈은 9일 편지에서 “나를 포함한 금융계 전문가들이 금융 환경이 이토록 가혹할 결과를 낳을 줄 오랜 기간 몰랐다는 게 너무나 유감스럽다”고 적었다. 그를 둘러싼 온갖 비판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그는 10년간 보수로 1억1000만 달러를 챙겼다. 반면 씨티그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900억 달러 넘는 돈을 까먹었다. 월가에선 그동안 그가 한 일이 무엇이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의 유감 발언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금융 수퍼마켓 전략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데 대한 아쉬움이다. 루빈은 금융시장이 하나로 통합되고 글로벌화한 상황에서 씨티그룹 같은 수퍼마켓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금융 환경의 변화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머니게임이 극에 달하면서 방종과 탐욕이 도를 넘어 버린 것이다. 씨티그룹 임직원 가운데 적잖은 사람이 고삐 풀린 듯 머니게임을 벌였다. 그들은 거대한 금융 공룡 씨티그룹의 후광을 업고 경쟁 회사보다 싼값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자 리스크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했다. 저금리 시대 고수익을 챙기기 위해 서브프라임이 뒤섞인 부채담보부증권(CDO) 등을 마구 사들였다. 심지어 일부 나라에서는 채권 시세를 조종하기도 했다. 더 많은 성과급을 타내기 위해서였다.

큰 덩치가 화근이었다. 씨티그룹의 사업 부문만도 12개에 달했다. 이들 사업 부문이 107개 나라에 진출해 30만 명이 넘는 임직원을 거느렸다. 미국 뉴욕 본사에서 이런 방대한 조직을 통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99년 이후 씨티그룹 임직원이 직·간접적으로 얽힌 금융 스캔들만 10여 건에 이른다. 경영진이 제대로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방증이다.

씨티의 군살 빼기는 다른 금융 수퍼마켓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스위스 복합 금융그룹인 UBS의 경우가 그렇다. 이 회사는 2003년 씨티그룹을 본받아 시중은행과 보험·자산운용·투자은행을 묶어 금융 공룡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씨티가 앓았던 ‘비만의 충격’에서 UBS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금융위기에 UBS는 660억 달러를 손해 봤다. 주주들은 투자은행 부문 등을 분리·매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씨티그룹은 출범한 99년과 마찬가지로 해체의 순간에도 세계 금융의 모델이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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