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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남자답지 않은 남자가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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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 이동통신회사의 광고 문구다. 여자 둘이서 전화통을 붙잡고 수다를 떤다. 괜찮다 싶은 남자를 힘들게 찾아냈더니 여자 친구가 있고, 완벽한 남자다 하고 보니 남자 친구가 있다고, 그래서 여자들에게 맞는 남자 찾기가 너무도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여자들의 수다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상황 설정이다.

요즘 미혼 여성들의 제짝 찾기가 얼마나 힘이 들면 통신비가 부담이 될 만큼 수다가 길어질까? 그 길어진 수다 때문에 걱정되는 통신비 부담은 알아서 통신사가 줄여 준단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 특성상 주류가 원하지 않는 선은 넘지 않는 수위에서 동성애 코드도 살짝 넣었다. 굳이 젠더니 성(性) 정체성 같은 거대 담론을 이 자리에서 얘기하자는 건 아니다. 남자 친구가 있는 남자, 다시 말하면 동성애자가 미혼 여성들에게 더 완벽한 남자로 여겨지는 까닭은 도대체 무얼까?

그렇다면 내 여자에겐 좀 더 강하고 완벽해 보이려는 맘에서 처방 없이 목숨 걸고 파란 알약을 입 안에 털어 넣거나 강한 남성 만들기 광고에 혹해 기웃기웃하는 그 짜안하고 눈물겨운 노력이 헛삽질이라는 말인가? 요즘 남자들이 무척 혼란스러워 할 만하다.

남자다운 남자의 조건을 살펴보자.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의 고수같이 물위를 걷거나 수많은 적을 한 방에 물리치지는 못할지라도 사내 대장부다운 강한 체력과 힘을 갖추는 건 기본이다. 집식구들을 통제하거나 군림할 수 있는 강한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밖에서의 일도 시시콜콜 얘기하면 계집애 같은 남자가 되고 아파서 울면 소심한 남자가 된다. 진짜 힘들겠다. 남자답게 살기가…. 이런 ‘남성다움’의 신화는 지난 시대에 만들어지고 요구되었던 철 지난 규범이고 동양적 문화이리라.

이러한 규범은 ‘하지 말라’는 금지의 논리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이 금지 또한 자유와 창조적인 자아 실현에 큰 걸림돌이 되는 폭력적인 권력 기제일 것이다. 남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 ‘남성다움’의 굴레야말로 남자들을 향한 또 다른 인권 유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폭력적인 규범들이 그동안 더 많은 돈과 권력을 남자들에게 쥐어주었는지는 몰라도 가정 안에서는 그들을 ‘섬’과 같이 고립된 고독한 아버지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자들은 ‘남성다움’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남자들을 좋아한다. 여자들에게 완벽한 남자의 조건이 바로 이것 아닐까? 그 옛날 마당에서 도끼 들고 장작을 패던 남자가 요즘에는 도끼 대신 ‘꽃을 든 남자’로 바뀌어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여자건 남자건 강박관념에 눌려 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자들은 진작부터 이 허구와 편견을 걷어내고 건강한 ‘남자 같은 여자들’로 변신하고 있다. TV 드라마에서도 ‘요부’로 알려졌던 천추태후를 ‘나라를 구한 여걸’로 재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남성다움’ ‘여성다움’ 모두 인간이 만든 덫이다. ‘남성다움’을 지켜내기 너무도 힘들고 아프다고 호소하는 남자가 점점 늘고 있다. 이제는 남자들도 여자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싶어하는가 보다. 이참에 ‘여자답지 못한 인간과 남자답지 못한 인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새 달력을 걸었다. 열두 면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숫자마다 무척이나 힘든 하루하루가 될 거란다. 지난해에는 복잡하고 꼬인 일이 너무도 많아 마무리하느라고 새해 결심도 놓쳐버렸다. 해가 바뀐 지 보름이 넘어 버렸지만 가족을 위해 지금이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남자답지 않은 남편, 여자답지 않은 아내가 되자’. 벌써부터 발목에 채워졌던 족쇄 자리가 간지러워진다. 남편 어깨에 올려놓았던 짐도 내려주어야겠다. 음식값도 휘발유값도 더 오른다고 한다. 내친 김에 덜 먹고 많이 걸어서 에스 라인이나 만들어 볼까 보다. ‘위기가 기회다’라는 말 이럴 때 써먹어도 될라나?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약력:이화여대 과학교육과 졸업. 아주대 경영학 석사.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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