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왜 '老害論' 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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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나 역사의 흐름을 논의할 때 피뢰침이란 말이 은유적으로 거론된다.정권을 뒤엎을만한 엄청난 저항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해내는 인물이 피뢰침이다.대기중에 흐르는 전기가 순간적으로 한 곳에 몰리는 것처럼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 중요한 일들을 빨아들여 무게있게 처리하는 인물 역시 그렇게 비유된다.요즘 일본에선 나카소네 야스히로,다케시타 노보루,미야자와 기이치 등 3명의 전직 총리들이'피뢰침'으로 지칭된다.

일본처럼 시도 때도 없이 위기설이 난무하는 선진국도 드물다.오키나와 미군기지 사용기간 연장문제나 예산안 처리,미.일 방위지침 개정문제 등을 둘러싸고 여차하면 중의원이 해산될지도 모른다고 늘 떠들썩해 왔다.3월 위기설을 겨우 넘기면 6월 위기설이 다가온다.

그 고비 고비를 넘기는데 막후에서 물밑 작업을 하는 인물 가운데 3명의 전직 총리들이 끼어있다.나카소네는 자민당과 신진당 등 두 보수정당에 다리를 놓아 오키나와 문제를 해결한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중의원 재직 50년의 특별 표창까지 받은 그의 야망은 정치적 기반이 약화된 자민당의 재건을 통해'강한 일본'을 만드는데 있다.

노회한 다케시타나 미야자와도 하시모토 현 총리의 정치 조정능력을 지원해주며 총리자리에 앉을 다음 후보물색에 들어가 있다.한편으로는 권력에서 초연한 정계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킹 메이커로서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있다.원로 3인의 중용(重用)은 관례에 따른 전관예우이기도 하다.그러나 현직 총리의 정치력을 무르게 할만한 노해(老害)현상을 예의주시하는 세력도 있다.구세대로부터의 역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원로(元老)는 1880년대 후반 메이지(明治)시대에 일왕을 보좌하는 정치가로 이토 히로부미가 중용되면서 그 역할이 시작됐다.추밀원 의장직을 내놓은 이토는 원로로서 총리대신의 선임에 깊이 관여했다.

러.일전쟁때나 청.일전쟁을 전후해서도 총리를 역임한 쟁쟁한 인물들이 원로의 힘을 발휘했다.그 결과 당시 정치무대에서 활약했던 후배 모두가 소인물(小人物)이 됐다.원로들은 80세를 넘도록 자리에 연연했다.힘이 약화된 당시의 정부는'졸리운 내각'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근대 일본정치에서 원로들은 신국가 형성에 기여했다는 공(功)이 있었지만 노령화로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의적이며 2~3류의 인물들을 측근에 배치해 정계에 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일본 재계에서도 노해론(老害論)이 거론되고 있다.주요기업들의 명예회장이나 상담역이 인사.경영권까지 좌지우지함으로써 사장의 활동영역이 위축되고 집행부가 추진하는 구조조정계획이 암초에 부닥쳤다.일본 제2의 항공회사인 ANA(全日空)의 경우 관료출신의 82세 명예회장이 사장의 변화추구노선을 강력히 견제함으로써 사실상 그를 축출하고 말았다.노무라증권이 총회꾼에게 부당이익을 제공한 혐의로 일본 국민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는 배경에는 상담역들의 흑막이 게재돼 있다.역시 비슷한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아지노모토사(社) 경영진도 노해에 시달린 나머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일본언론에서 큼지막하게 보도되고 있는'한국 스캔들'은 정치인들의 노해가 빚어낸 것이 아닌가고 묻는 일본인들이 많다.'그때 그 사람들'의 무대인 서울 정치판에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은 정말 추호도 들지 않는다.장강(長江)의 앞물이 뒷물에 밀려 퇴장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이다.60대라도 머리가 낡아 세계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 물러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옛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가 80을 넘어서도 정치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창조적 리더십에 국민이 공감을 보냈기 때문이다.노해를 극복할 현명한 방법은 없는가.해외 교포들에게 자존심을 심어줄 지도자는 없는가.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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