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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병, ‘그냥 참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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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을 상대로 인터뷰도 하고 설문조사도 하다보면, 가끔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대답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를 했느냐고 물어보면, 10명 가운데 9명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참았다’

‘그냥 참았다’는 응답은 물론 거의 모든 사내정치 피해자들의 공통된 대답이기도 하다. ‘따돌림’이 아닌 다른 사내정치 유형에 대해서도 ‘그냥 참았다’란 응답이 많다는 것이다. ‘그냥 참았다’가 유행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냥 참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참 좋은 말일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지 않았던가? 참을 ‘인’자를 세 번 쓰면, 살인도 면한다던가?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보면, 하늘이 감동해서 벌할 자는 벌을 하고, 복을 내릴 ‘나 같은’ 자에겐 복을 내린다는 믿음도 만만치 않고.

그러나 모든 이가 이처럼 해피 엔딩을 맞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인 모양이다. 위 사례의 P씨는 결국 어느 날 말다툼 끝에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사직! 그래서 그것으로 끝이었냐고? 아니다.

고향으로 내려간 이후 매일 같이 억울하다는 생각에 시달리던 그는 급기야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올라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고, ‘왜 한마디 말도 못했을까? 왜 당하기만 했을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영원히 바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왕따에 앞장섰던 그 놈을 ‘혼내 주기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1년 만에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곧장 일하던 가스총전소로 향했고, 준비해 간 칼로 그 놈을 위협하면서 혼내주려 했는데... 이런! 싸움을 말리던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이 그만둔 뒤에 들어온 직원을 찌르고 말았던 것이다. 졸지에 칼에 맞아 죽은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하늘도 늘(?) 공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건 직후, P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차라리 그때 한 대 때렸더라면, 그게 더 나았을 텐데”. P씨 사례는 S방송본부 ‘추적, 사건과 사람들’이 1998년에서 다룬 ‘비상구 없는 직장 왕따’에 나오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사례를 보면서, 지금 등짝에 식은땀이 날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왕따를 주동하는 분들이라면 특히 더 할 것이고, 그 왕따 결과 누군가 퇴사를 당했다면 더욱 더 할 것이다. 물론, 왕따 결과 누군가 자살을 했다면, 이미 잠자리가 편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P씨의 경우는 그냥 참았다가 오히려 화를 더 키운 경우에 해당하는데, 이런 경우가 은근히 많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P씨 사건이 터지자 주변 사람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당한 느낌이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가해자들은 대체로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는 사이에 피해자는 생사‘를 오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직장인을 상대로 왕따/따돌림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검토해보면, 적게는 15%에서 많게는 35% 정도까지 직장 내에 따돌림이 존재하고 있고 자신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미국의 경우에도 유사한 수준으로 응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략 30% 선으로 보더라도, 10명 가운데 3명이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다는 것인데, 이처럼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심, 기업 차원의 관심은 덜한 편이다. 빈도수로 보면 오히려 학교 왕따보다 흔하지만,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성인들 사이의 일이니까 뭐 큰일이야 일어나겠느냐는 인식이 한 편에 자리 잡고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그 정도는 헤쳐 나가는 것이 인생이지 하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본다.

사내 왕따의 원인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너무 아부만 해서, 너무 일만 해서, 너무 일을 못해서, 너무 일을 잘해서, 좋은 학교 못 나와서, 혼자만 좋은 학교 나와서, 잘난 척 해서, 너무 겸손해서, 술을 못 마셔서, 술을 너무 권해서, 술을 너무 안 권해서, 술버릇이 고약해서, 말을 너무 잘해서, 말을 너무 안 해서, 혼자 밥먹기를 즐겨서, 냄새가 안 좋아서, 뒷담화에 안 끼어서, 노조 가입을 안 해서, 종교가 특이해서, 너무 뚱뚱해서, 혼자만 너무 날씬해서 등등.

왕따가 나타나는 유형도 물론 다양하다. 은근한 왕따 ‘은따’부터, 노골적인 왕따 ‘노따’, 그리고 스스로 왕따 ‘스따’까지 존재한다. 왕따를 가하는 방식은? 가장 흔한 것부터 살펴보면, 눈길 피하기, 대화 피하기, 마주치지 않기, 무시해 버리기, 식사 또는 회식 자리에서 빼기, 일 안 주기, 공식정보 안 알리기, 창피 또는 망신 주기 등등.

그럼, 왕따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것이 좋을까? ‘그냥 참는다’가 대세긴 하지만, 이것은 화를 더 키워서 최악의 경우에는 살인이나 자살까지도 부르거나 최소한 우울증을 초래하기 때문에, 권장할 만한 대처법이 아니다.

권장할 만한 대처법은 첫째, 상황을 공개하고, 둘째, 왕따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약한 고리부터 분할 공략해서 무력화하고, 셋째, 잘 통하는 상사에게 상황을 알려 조정을 부탁하고, 넷째, 왕따를 주동하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고 그것이 안 통하면 맞서거나 역공을 가하고, 다섯째, 그래도 안 되면, 회사를 옮기는 것이다.

왕따는 상사나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에, 상당부분 해소가 가능하다. 윗사람이 아랫사람 간에 벌어지는 왕따를 인지하고, 또는 회사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처할 의지를 가지고, 가해자에게 경고를 주거나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반면에, 상사가 특정 부하를 왕따 시키도록 조장하거나, 회사 차원에서 누군가를 따돌림 시킨다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심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사내 왕따로 자살을 한 것에 대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한 경우가 있고, 사내 왕따를 산업재해로 인정한 경우가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일부 선진국, 예컨대 스웨덴과 캐나다 일부 지역에서는 따돌림을 비롯한 사내 괴롭힘에 관한 법안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고, 미국과 영국 정부와 기업도 '직장 내 인간 존엄에 관한 법률' (diginity at work bill)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는 이유는? 관련 소송이 줄을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 대부분 회사를 떠남에 따라, 기업에 손실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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