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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달리, 미네르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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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작가 신경숙씨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인터뷰를 하면서다. 책 띠지에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이 등장한다. 지레짐작으로 밀레의 ‘만종’에서 따온 것이려니 했는데, 작가의 설명은 밀레가 아니라 달리였다. 흘러내리는 시계그림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말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만종’은 해질 녘 들판에서 남편과 아내가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다. 밭일을 하던 중이었던 듯 남편의 곁에는 쇠스랑이, 아내의 발치에는 감자 바구니가 놓여 있다. 달리는 이 그림을 전혀 다르게 봤다. 놀랍게도 감자 바구니 자리에 죽은 아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달리의 발상대로라면 ‘만종’은 목가적 감사의 순간이 아니라 아기를 잃은 비탄을 포착한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듣고 보니 『엄마를 부탁해』의 의미가 한결 뚜렷해졌다. 『엄마를 부탁해』는 일평생 가족을 보살펴온 엄마의 헌신을 일방적으로 예찬하거나 신비화하지는 않는다. 그 엄마 역시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였음을 역설한다. 밀레의 오리지널 ‘만종’과 달리가 재해석한 비극성이 고루 ‘엄마’의 양면인 셈이다.

물론 달리의 해석을 정확한 사실인 양 힘을 실어주는 일화도 많이 퍼져 있다. 나중에 X선 투시를 한 결과 감자 바구니 밑에서 다른 형상이 드러났다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다. 또 다른 이야기는 밀레가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던 가난한 부부의 갓난아기가 숨지자 그 가슴 아픈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가 주위의 권유로 지금처럼 수정했다는 것이다. 즉 밀레의 그림에 본래 담겼던 비극성을 달리가 직관적으로 알아챘다는 시각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달리의 해석이 사실처럼 통용되는 데 부정적이다. “밀레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어린 시절 저녁 종이 울리면 할머니가 꼬박꼬박 기도를 올리도록 했던 것이 창작 동기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만종’에 대한 달리의 해석 자체도 단순하지만은 않다. 달리는 ‘만종’을 모티브로 여러 편의 그림을 그렸다. 그중에는 남편의 농기구를 성적인 도구로, 아내를 나중에 수컷을 잡아먹을 교미 직전의 곤충으로 해석한 작품도 있다. 분명한 것은 밀레의 ‘만종’에 달리가 상당히 집착했다는 점이다. 달리는 자신의 그림 속에 ‘만종’을 때로는 그대로, 때로는 변형해서 등장시킨 것은 물론이고 『밀레의 ‘만종’의 비극적 신화』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청년기의 달리는 말년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동시대를 살았다. 직접 만났고,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제창한 무의식은 달리의 초현실적 그림을 관객들이 이해하는 손쉬운 키워드다. 달리의 직관이 밀레의 숨은 의도를 정확히 짚어냈다기보다는 누구나 아는 이 그림에 자신의 무의식을 투영했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요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또다시 뜨거운 이슈의 중심에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 금융위기에 대한 미네르바의 통찰과 예측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경제전문가들이 채점해 성적표를 매길 일이다. 법적으로 단죄해야 할지 여부 역시 검찰과 변호인단의 본격적인 공방이 벌어질 참이다. 오히려 두고두고 씹어봐야 할 점은 미네르바 현상이 우리 사회의 무의식과 어떻게 맞닿았는가 하는 점이다.

달리의 무의식은 밀레의 ‘의식’과 충돌해 새로운 작품을 낳았다. 미네르바에 대한 열광에는 오리무중의 현실에서 쾌도난마식 해석을 기대하는 무의식적 심리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미네르바가 퍼올린 집단 무의식은 답답한 현실을 재창조하는 역할을 해준 것일까. 검찰의 시각으로는 전혀 아니다. 그릇된 정보로 세상을 혼란케 했다는 게 지금 거론되는 죄목이다.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던 ‘죽은 아기’, 즉 누적된 불신을 만천하에 발굴해냈다는 것은 미네르바 현상의 공로다.

이후남 중앙SUNDAY 문화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