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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금도 ‘회의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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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연초인 탓도 있겠지만 뉴스를 통해 중요한 회의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어려운 경제를 풀기 위한 각급 회의에서 별만 500여 개가 모였다는 전군지휘관회의까지 각종 회의가 줄을 잇고 있다. 급기야 핵폭탄도 견딘다는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까지 열렸다. 이 이상 심각한 회의가 있을까? 전쟁의 긴박감마저 느껴진다. 여론이 공감하고, 성과도 거둘 수 있는 정책이 회의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튀니지에서 독일의 롬멜 군단에 대패한 미군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무패의 싸움닭 패튼 장군을 전선에 보낸다. 전장에 도착한 패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참혹한 패배로 사기를 잃어 오합지졸이 된 미군의 기강을 잡는 것이었다. 그의 첫 명령은 “복장을 단정히 하고, 새끼줄이라도 좋으니 넥타이를 맬 것”이었다. 며칠 후 말단 사병이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지휘계통이 확립됐다고 확신한 패튼은 간결하고, 분명한 명령으로 전선의 맨 앞에서 부대를 지휘한다. 패튼의 부대는 모든 전쟁사를 통해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패튼의 지휘 스타일을 통해 ‘훌륭한 성과는 명확한 계획, 일체화된 조직, 솔선수범과 현장확인으로부터’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여론의 인정을 받는 정책은 무조건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 그렇지 못했던 예가 너무나 많다. 불과 몇 사람의 경험과 지식으로 만들어지고 평가되는 것이 정책이다. 그 안에 4900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회의를 통해 중지를 모으게 되지만 각계의 경험을 보태다 보면 본래의 뜻과 책임 소재가 흐릿해져 처음의 명확했던 계획과는 딴판이 되기 일쑤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부 정책을 이해도도 다르고, 온도차도 있는 지방정부와 공공조직이 집행해야 한다. 내용도 잘 모르면서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별 수 없이 뒷말 나오지 않게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한 집행체계를 만들어 서로 책임을 미룰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 끝에 종점에 다다르게 되면 처음에 그렸던 호랑이는 온데간데없고, 고양이 구경도 하기 어렵게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정부가 기대하는 온기가 현장에 언제 전해질지도 모르는 판에 어떻게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회의보다 조직의 일체화가 더 중요한 이유다.

결과가 좋은 정책이야말로 훌륭한 정책이다. 일이란 정책 결정자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실무자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가 확고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결과를 입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또 일선에서 신념과 책임감을 갖고 현장에 알맞게 정책을 적용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권한을 줘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전술가는 5%의 지시와 95%의 감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정부는 연습만 하다가 1년을 허송하고 말았다. 경제위기 초기에 단호한 정책을 선보이지 못해 국민의 신뢰를 못 얻었고, 그 후에도 안정적으로 기반을 다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직 정비에 시간을 끄는 바람에 주요 공직이 아직도 공석인 채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상당수의 공조직은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를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사표를 낸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나 책임자가 없는 조직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도 은행의 창구직원은 정책을 따르는 것이 불안하고, 행정의 창구직원은 정책방향을 숙지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고 있다. 새해 첫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신속하고, 공세적으로 푼 3조7000억원의 예산은 언제쯤 대민 창구에서 풀릴까?

‘속도전’을 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회의하고, 보고하는 것을 넘어 현장에서 막힌 곳을 뚫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관련 공직자가 정책을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정신무장을 강화하고,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현장에서 확인할 조직체계를 갖춰야 한다. 실질적인 정책효과를 거두려면 일선 조직이 두려움 없이 민간조직과 융합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도 만들어줘야 한다. 하루가 빠르면 위기 해결도 하루가 빨라진다.

중앙에서 회의가 길어지면 현장에서 실행에 옮길 시간을 빼앗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요구만 늘어날 뿐이다. 회의는 짧게, 그러나 지원과 확인은 과감하고 세밀하게 해야 위기 극복에 승산이 있다.

이정재 서울대 교수·지역시스템공학

◆약력: 서울대 농공학과 졸업. 서울대 박사. 서울대 지역시스템공학과 교수. 전 한국농공학회 회장. 전 한국농촌계획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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