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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20. 보은 법주사와 삼년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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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보은 삼년산성은 눈앞에 속리산이 펼쳐지는 호젓한 산책로다. 3년 걸려 쌓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용철 기자

▶ 속리산 법주사 국보55호인 팔상전(左)과 국보5호인 쌍사자 석등.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우기를 한반도의 면적(22만㎢)은 미국 텍사스주(69만㎢)의 3분의 1도 안 된다며 얼마나 땅덩이가 좁은지를 강조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엔 약간의 억지가 있다. 항공촬영한 바닥 면적으로야 그런 치수의 비교가 가능하지만 인간이 실제 사용하는 땅의 면적은 그렇지가 않다. 텍사스는 대평원으로 지적도와 실평수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산과 언덕이 쭈글쭈글하게 솟아 있어 그것을 반듯하게 다리미질하듯 펼쳐놓으면 면적이 세배 네배도 더 된다. 마치 신축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전철역에서 직선거리 300m"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걸어서 15분 걸리는 1km일 때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가.

충북 보은은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140km밖에 안 된다. 그러나 자동차로 세시간 안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보은은 때론 멀고도 외진 고을로 생각하는 이도 있고, 속리산 법주사는 알아도 보은은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 보은은 당당한 고을이었다. 영남에서 추풍령 너머 서울로 가자면 황간.보은.청주를 거쳐 가는 것이 정코스였다.

1893년 동학 제2세 교주 최시형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깃발 아래 전국 동학교도 2만여명의 집결을 내린 곳이 이곳 보은 장대리 대추밭이었다.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三南)은 물론이고 기호.강원 지방 교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최적지가 여기였던 것이다. 결국 이 보은 집회는 이후 동학혁명과 농민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는데 지금 그 자취는 찾을 길 없고 논둑에 쌓인 그 때의 성벽돌에서만 흔적을 읽을 뿐이다.

보은이 국토에서 점점 소외되어간 것은 남북교통의 중심축이 대전을 돌아가면서 철도.고속도로 모두가 보은을 비켜가면서부터였다. 게다가 중부고속도로는 청주에서 멎고, 중앙고속도로는 안동.단양으로 뻗어갔고 지금 공사 중인 중부내륙 고속도로도 충주.상주로 이어져 있으니 보은은 오랫동안 전국 교통망의 여백에 남아있을 것 같다. 다만 청주.상주를 잇는 동서고속도로가 계획에 있는 것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은은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전원의 풍광을 지니게 되었다. 교통의 소외지이긴 마찬가지인 괴산군과 상주시와 함께 둘러싸고 있는 속리산 아랫자락으로 난 길은 장중한 속리산을 한쪽에 두고 정겨운 마을과 논밭 그리고 맑은 냇물이 어우러져 마지막 남은 농촌 풍경의 고즈넉함을 보여준다. 길가엔 여간해선 '가든'(숯불갈비집)과 '파크'(모텔)를 볼 수 없다. 특히나 49번 지방도로 견훤산성으로 가는 길은 한적함과 편안함을 찾는 나들이객에겐 말할 수 없는 드라이브의 기쁨을 준다. 문화유산답사란 곧 여행인데 여행에서 이런 기쁨을 잊은 지 그 얼마만이었던가.

보은의 문화유적이라면 당연히 법주사를 꼽을 것이다. 삼국시대 목탑 형식을 충실히 반영한 팔상전 오층목조건물(국보55호), 17세기를 대표하는 중층전각인 대웅보전(보물915호), 정교하면서도 굳센 기상을 보여주는 통일신라시대 쌍사자 석등(국보5호),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연꽃 모양의 돌물확(국보64호), 거기에 고려시대 마애여래상(보물216호), 사천왕석등(보물15호), 엄청나게 큰 철당간과 철확. 그 국보.보물이 어느 사찰보다 많은 곳이 법주사다.

그러나 나는 법주사를 갈 때면 항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다닐 뿐 속리산의 장한 산세와 절집이 어울리는 조선 건축 특유의 그 조화로움은 살피지 못한다. 그것은 20세기 말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입상이 나를 압도해 그것을 피하고자 외로 돌곤 한다. 조각가 김복진이 제작한 미륵대불은 비록 시멘트였지만 그런대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 있어 눈에 크게 거슬리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법주사에서 나의 발길은 항시 바빠지고 시험답안지 쓰듯 국보.보물의 낱낱 유물을 살피고는 무엇에 쫓기듯 절집을 빠져나온다.

장엄한 산 속의 아름다운 절, 그리고 조용한 사하촌(寺下村)의 정겨운 여관집. 그것이 우리네 산사 순례의 진국이며 그 모든 것을 즐기는 여유로운 발걸음이 답사의 맛인데 법주사에선 정녕 그런 기쁨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법주사에 갈 때마다 내게 떠오른 글귀는 최치원의 명구로 꼽히는 속리산의 글자 풀이다.

"산은 세속과 멀어지지 않으려 하건만, 세속은 산과 멀어져버리는구나"(山非俗離 俗離山).

나의 법주사 답사는 거의 반드시 보은의 삼년산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답사, 걸으면서 생각하고 즐기는 호젓한 산책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삼년산성은 이웃하고 있는 견훤산성,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과 함께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1000여 산성 중 3대 산성으로 꼽힐 만한 명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자비왕13년(470)에 처음 쌓고 계속 증축되었다가 경덕왕 원년(742)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설로는 3년 걸려 쌓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하나 최영희 선생은 본래 이 동네 이름이 삼년(三年)이었던 것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보은의 원 지명이 보령(保齡)이었다가 충남의 보령(保寧)과 발음이 비슷해 보은(保恩)으로 바뀐 것인데 삼년이란 곧 보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삼(三)이란 우리말로 "믿"이고 년(年)이란 나이 령(齡)과 같은 뜻이란다.

아무튼 삼년산성은 둘레가 1.7km에, 성벽의 높이가 지형에 따라 높고 낮지만 보통 13m에서 20m가 되는 거대한 규모다. 성벽을 한바퀴 도는 데 40여분 걸린다. 1980년에 있었던 보은지방 집중호우로 한쪽이 크게 무너졌으나 최근 10년간 보수와 복원을 거듭해 처음 간 사람들은 정말로 이렇게 거대했나 의아해 하며 "이거 진짜 맞냐"고 되묻곤 한다. 삼년산성을 거니는 기분은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산성이 그렇듯이 탁 트인 전망이 혹은 보은 읍내가, 혹은 속리산이, 혹은 푸르고 누런 들판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기는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신라의 최전방으로 신라가 백제 성왕을 공격한 관산성전투의 부대가 삼년산성에 있었다는 사실, 훗날 헌덕왕 때 김헌창 반란군을 여기서 물리쳤던 일, 견훤이 먼저 삼년산성을 차지해 왕건을 물리쳤던 일 등이 이 성의 굳셈을 실감케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얘기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말하기를 임란 때 우리는 평지성싸움은 다 패했어도 산성싸움은 대개 승리로 이끌었다고 했다. 유성룡의 말대로 삼년산성이 있어 황간.영동쪽으로 오는 왜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경새재로 돌아 올라갔고 문제의 장수 신립이 새재의 산성을 버리고 충주 달래강에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며 한양길이 뚫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신립이여, 산성은 우리 산하가 낳은 최고의, 최후의 보루임을 그대만 왜 몰랐단 말인가.

명지대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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