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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작가 김남희가 전하는 피스 & 그린보트

중앙일보

입력

-이렇게 죽을 수도, 이렇게 살 수도 없는 나이. 서른 넷에 방 빼고 적금 깨 배낭을 꾸렸다.- 김남희의 홈피 도입부의 글귀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삶에 커다란 울림이자 강렬한 유혹이다. 이후 그녀는 ‘유목민’이 됐다. 그리곤 유행가 가사처럼 ‘걸어서 저 하늘까지’ 낯선 지구촌을 헤맨다. ‘나’를 찾아 배낭을 채우기 위해. 족적 만큼이나 쌓인 소중한 인연·추억·깨달음…. 겁 많은 그녀로 하여금 모진 ‘행군’을 멈추지 않게 부추기는 동력이다. 김남희가 몸으로 전하는 색다른 여정의 기록을 프리미엄이 담았다.

일찍이 달라이 라마가 말씀하셨다. 인류는 달나라까지 다녀왔지만 이웃을 만나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유목하는 삶으로 돌아선 이후 가끔씩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하는 여행이 진정 내가 꿈꾸었던 여행일까. 살면서 쌓아온 벽과 경계를 넘어 소통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더 나은 여행을 모색하며 ‘피스 앤 그린 보트’에 올랐다.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함께 띄우는 ‘피스 앤 그린 보트’는 2008년이 네번째다. 배에서의 하루는 아침마다 발행되는 선내 신문을 통해 그날의 일정을 점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승선 후 첫 프로그램은 ‘슬로 라이프’의 저자 쓰지 신이치 씨가 진행하는 ‘행복’에 관한 간담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속도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전제조건인지를 묻는다.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생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를 추구하는 부탄의 경험을 들어보자. 부탄이 국가 정책으로 선정한 국민총행복 개념에는 생태계의 보호, 전통문화의 보존,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경제 발전 등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들이 담겨져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200달러의 부탄의 국민행복지수는 세계 8위, 2만 달러 한국의 행복지수는 102위.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고,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선상 강의는 정치와 문학, 영화, 철학의 분야를 넘나들며 전 방위로 진행된다. 오키나와에서 나고 자란 치넨 우시 씨가 일본 전체 미군 기지의 75% 가 배치된 오키나와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소설가 하성란 씨는 생태문학을, 칼럼니스트 조용헌 씨는 ‘조선의 명문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에서는 신동만 PD의 자연 다큐멘터리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가상영되고 있다. ‘어디로’가 아닌 ‘어떻게’ 여행할까를 고민하는 ‘책임여행’강연도 진행된다. 모처럼 발화된 학구열에 마음은 불타지만 몸은 하나뿐. 출석 확인도, 학점도 없는강의를 이토록 열심히 들어보기는 얼마나 오랜만인지.

전문가들의 강의보다 더 빛나는 건 승객들이 직접 운영하는 자치 프로그램이다.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자치 프로그램이야말로 피스 앤 그린 보트의 보석. 3층 라운지에서는 40년을손바느질로 가족을 지켜온 이범순 어머님이 무료로 옷수선을 해주시고, 2층 다다미방에서는 11살 가람이가 주최한‘방석 빼며 놀기’가 한창이다. 일본인 대학생 나오코가 진행하는 ‘리빙 라이브러리’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도서관이다. 책이 된 인간을 질문을 통해 읽어가며 편견을 깨는 멋진 프로그램이다. 연속되는 강의에 과부하가 시작될 무렵이면 메인홀로 내려간다. 이곳에서는 노래와 춤을 통해 우정을 다지는 ‘아시안 비트’의 연습이 한창이다. 슬쩍 끼어들어 음치와 몸치의 이중 장벽을 극복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해 본다. 어느덧 바다에 밤이 내리고 갑판은 별빛무대로 바뀐다. 한국의 이한철과 일본의 랩퍼 가쿠마카 샤카가 함께 펼치는 공연을 온 몸으로 즐기다 문득 올려다보는 하늘, 별이 빼곡하다.

그 사이 배는 파도를 가르며 남쪽으로 향한다. 첫 기항지는 오키나와의 이시가키섬. 그곳에서 작은 통통배를 타고 삼십 분쯤 가면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남쪽으로 튀어’의 그 남쪽이 되었던 이리오모테섬이다. 지역주민과 함께 걸으며 섬의 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에코투어리즘을 경험하는 동안 다른 그룹은 아오이 유우의 영화 ‘편지’의 무대가 되었던 다케토미 섬을 둘러보거나, 농부들과 함께 사탕수수를 수확한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도 즐겁지만 피스 앤 그린 보트의 진정한 매력은 따로 있다. 바로, 사람들이다. 비밀스러운 자격 심사라도 있는지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남다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바꿈으로써 세상의 변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식사때마다 1회용 젓가락이 아닌 자신이 가져온 젓가락을 사용하고, 객실의 시트를 매일갈지 말라고 요구함으로써 작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에 반해 4회째 승선한 사소 쓰토무(60세)씨는 “이제 다른 여행은 하고 싶지가 않다”며 내년에도 이 배를 탈거라고 말한다. 피스 앤 그린 보트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통역 담당으로 승선한 장석진(34세)씨는 부인이 된 일본인 아유미 씨를 이 배에서 만났고, 처음 탔던 경험을 잊지 못한 하남주씨는 직업을 바꿔 올해 스태프로 다시 배에 올랐다.

인터넷이 없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나는 곳. 국경과 언어, 연령과 성별의 장애를 넘어 친구가 되는 곳. 타인과의 만남을 가장 뜨겁고 밀도 있게 경험할 수 있는 곳. 작지만 의미 있는 실천을 모색하는 곳. 참여하고, 장벽을 넘고, 편견을 부수고, 실천하는 진정한 의미의 책임여행을 경험하는 곳. 거짓말 같다면,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타보기를.  

글= 도보여행작가 김남희
사진 제공= 환경재단 피스앤그린보트

피스 &그린보트투어
배라는 공간에서 동북아시아의 사회와 문화, 환경 문제를 열린 시각으로 보고 대안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여행이다.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NGO인 환경재단과 피스보트가 공동으로 주최하며 2005년 8월 첫 출항을 시작으로 2006년 12월, 2007년 7월 세 번째 항해에 이어2008년 11월 네 번째 항해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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