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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칼럼>한보사태, 본전을 찾는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번 청문회에서 정태수(鄭泰守)씨가 세상에는 음양(陰陽)이 있는 법이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한보가 나쁜 짓만 한게 아니라 경로당도 짓고,하키를 국제수준으로 올린 좋은 일도 했다고 하면서 마치 한보의 공과(功過)가 반반이란 것처럼 말한 것은 어이없는 일이지만,어둠 저편에 빛이 있고 혼란 끝에 질서가 새로 잡히는 순환의 이치는 부인할 수 없다.

한보사태가 석달이 넘게 계속되면서 청와대가 초토화되고,정치권이 초토화되고,금융권이 초토화됐지만 마치 산불이 지나간 고성(高城)산록에 새 순이 돋아나듯이 새질서를 향한 움직임과 노력도 하나씩 나타나고 있다.

요즘 아마 여야 대선주자들은 돈관리.사람관리에 부쩍 더 신경을 쓸 것이다.한창 잘 나가던 김현철씨가 비뇨기과 병원에서 CCTV에 찍힐 것을 어떻게 알았겠으며,'1백번도 더 만난'측근 박경식(朴慶植)씨가 자기 비밀을 털어놓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믿었던 민주계에서 음모론이 나오고 가신(家臣)인 부산시장한테서 부산경마장 개입의혹까지 나왔으니 측근이고 동지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이런 실례(實例)를 보는 대선주자들이 새삼 자기 주변사람을 한번 더 챙기고 미리부터 꼬투리 잡힐 일이 없도록 신경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벌써 대선주자들의 돈씀씀이에 대해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나 하는 힐난이 제기되고 있으니 분명 한보사태가 가져다 준 양(陽)의 측면이다.

한보 때문에 거덜이 난 은행들도 이번에 단단히 교훈을 받았을 것이다.청탁인지 압력인지 전화를 건 사람들은 일이 터지니까 아무 소용이 없고,구속되고 청문회에 불려나가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왔으니 골탕먹는 것은 은행 뿐이더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을 것이다.권력은 압력만 넣었지 보호는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테니 준법대출과 원칙주의경영으로 돌아서는건 당연한 일이다.

부실대출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은행직원들이 자기 은행 살리자고 봉급 10%를 반납키로 했다는데 이런 은행사람들이 다시는 권력 눈치놀음으로 부실대출을 해주지는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할 것도 뻔한 일이다.이 역시 한보사태가 초래한 양의 사례다.

줄줄이 검찰에 소환돼 떼망신을 당한 정치인들도 이번엔 아마 어금니를 물었을 것이다.과거엔 먹어도 그뿐이었던 돈도 이젠 가려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이다.일부 야당 초선의원들이 떡값 안받기 결의를 했다는 것은 한보사태의 약효가 나타나는 사례다.정치권이 고비용 정치구조 타파를 위한 제도개혁을 외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공직사회도 마찬가지다.아무리 막강한 청와대수석도 일이 터지면 당한다는 것을 한보사태는 보여주었다.대통령 지시든 대통령 아들의 부탁이든 부당한 처사를 자기손으로 하는 이상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언론계 역시 지난 몇년간 김현철(金賢哲)의 발호와 한보 거액대출에 대해 뭐 하고 있었느냐는 따가운 질책을 들었기에 똑같은 질책을 받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한보사태는 뜻하지 않게 우리나라 각 분야에 걸쳐 일대 개혁의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각 분야가 스스로 못하던 것을 한보사태가 등을 떼밀어 강제로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한보사태로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모른다.5조원이 넘는 돈도 돈이지만 경제혼란과 충격,기성 권위가 무너지는 신뢰위기,국민적 좌절감과 대외적 위신추락등 말할 수 없는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보사태를 이렇게 손해만 보고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이제부터 '본전'을 찾고 본전을 넘어 이익을 남기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한보사태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껏 알면서도 하지 못한 각종 과제를 자연스럽게 부각시켰다.정경유착의 단절,돈정치의 개혁,썩은 정치권의 물갈이,금융개혁,권력운용의 제도화 등의 필요성이 지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뚜렷이 부각되고 국민 누구나 절실히 공감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개혁을 성공적으로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유례없이 좋은 조건을 맞은 것이다.

한보사태의 본전을 찾는 길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이런 좋은 조건을 맞아 돈 안드는 대선을 치러내고,썩은 정치권을 물갈이하고,금융인이 책임지는 금융개혁을 이뤄낸다면 본전을 넘어 이익도 남길 수 있다.이제 더이상 좌절과 의욕상실에 빠져 있을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때를 한 풀 벗기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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