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오지호 화백 살던 광주시 초가집 그대로 보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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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천경자.김흥수등 함께살며 지도받아 “평생을 지산동 초가집에서 살면서/풀과 나무들과 햇살이 동동 굴러가는 것을 보면서,/벌써 고조선 촌부처럼 살고 있었네./수십년간 초가집 청마루에 걸터앉아서/쪽빛하늘 바라보고,햇살섞어서/조선의 삶을 물들이고 있었네”. 시인 손광은(孫光殷.전남대교수)씨가 고(故)오지호(吳之湖)화백을 노래한 구절이다.

한국 최초.최고의 서양화가인 吳화백은 82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달리 했다.하지만 吳화백이 평생 살았던 초가집(광주시동구지산동275)은 그대로다.작업실은 물론 손수 가꾸던 채송화 화단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집은 이제는 광주에 하나 뿐인 초가집이다.1백80여평의 집터에 20여평의 세칸짜리 흙담집에는 가지런히 이엉이 얹어져 있다.부엌에는 가마솥이 걸려있고 뒤켠에 장독대와 텃밭이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반세기전 시골집이다.멀리 뒤로는 무등산의 장원봉.향로봉.문필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 吳화백이 화폭에 담아냈던 질박한 자연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吳화백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53년부터 조선대 미대로 와 현대미술의 불모지 개척에 나섰다.학교에서 吳화백에게 관사겸 작업실로 사용하도록 이 집을 빌려주었다.이 집은 당시에는 그저 흔한 초가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60년대초 吳화백은 5.16세력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학교를 그만뒀다.대학측은 이 거장에게 감히 집을 내놓으라고 하지 못했다.

吳화백이 살던 30년동안 이 집에는 이름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녀갔다.吳화백이 초대하지도 않았던 거물 정치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유경채(柳景埰).천경자(千鏡子).김흥수(金興洙)화백등 수십명이 살다시피하며 지도를 받았다.

지금 이 집은 광주시지방문화재 기념물 6호.85년 吳화백의 둘째 아들 오승윤(吳承潤.59)화백이 조선대로부터 인수했다.이 초가에서 2명의 예술원회원(吳화백과 장남 吳承雨.67)이 나왔다.吳승윤화백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중견작가(국전 추천.초대작가)여서 3부자가 국전 초대작가가 된 셈이다. 〈광주=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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