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5조원의 수업료를 물었건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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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온 국민에게 충격을 주고 국가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한보사태가 이를 덮으려는 거대세력과 밝히려는 자 사이에서 우여곡절끝에 검찰수사 책임자의 교체까지 가져오면서 결국 청문회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관심과 기대 속에 청문회를 지켜보던 국민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국회의원들의 준비없는 질문과 정략적인 추태,정태수(鄭泰守)피고인의 오만방자한 답변태도 속에서 어쩐지 이번 청문회가 일종의 국민적 히스테리나 자학적인 희롱

의 수준에 그칠 뿐 심각한 반성이나 성실한 제도개혁의 계기가 되지 못할 것같은 안타까운 예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현대사에서 돈과 정치의 관계는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체 할 수밖에 없는 부패의 온상이었다.민족자본이 제대로 형성된 역사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수립이후 지금까지도 각종 경제활동을 하려면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60년대초 박정희(朴正熙)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계속적으로 집행하는 단계에서부터는 기업인에게 국책사업을 지정해주면서 온갖 지원을 약속하는 정부주도적 경제발전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재벌은 정부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생래적(生來的)관계가 정경유착이라는 구조적 부패의 고리로 점차 자리잡게 됐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정치자금이 여당에만 지정기탁됐다는 사실은 아직도 재벌들의 돈은 통치자가 벌게 해준 것이어서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조금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따라서 정부.여당이나 관료들이 재벌에 정치자금이든,떡값이든,뇌물이

든,성금이든 명목여하간에 손을 내미는 것은 당연한 전통이 됐고 기업들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또는 혜택을 얻고자 갖가지 명목의 돈을 바쳐왔다.이렇게 거액을 바친 기업들은 정상적 경영이 불가능하므로 결국 탈세를 하는 한편 은행돈을 몇조원씩 얻어 빚더미 재무구조를 만들어 놓고는 설마 국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릅쓰고 도산을 시키겠느냐 하는 배짱으로 여유만만했다.이것은 결국 국민의 돈을 가지고 정권과 재벌이 부당한 효용을 누리고 국가사회 전체의 효용을 불공정하게 왜곡시켰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러한 불공정을 바로잡기 위해 사정과 지속적 개혁을 약속하면서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전(前)정권의 핵심인사를 처단해온 문민정부에서 한보사태.대선자금 의혹,대통령차남 관련 의혹 등 역대 어느 정권보다 더 대담하고 무모한 정경유착적 비리와 의혹들이 겹쳐 터졌다는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고,이것이 국민을 가장 실망시켰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정치일정에 들어갈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 결국 어디서 나올 것인가.아무리 기업인으로부터 돈 한푼 안 받는다고 대통령이 큰소리 쳐봤자 선거철이 오면 필요한 자금은 결국 기업에서 나올 것 아닌가.여당후보가 자

금을 독식하다시피 모금해 이번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나면 또다시 다음 정권에서 대선자금 의혹으로 재생산되고 말 것이다.

청문회가 실망을 주면 줄수록 한보사태도 다음 정권에까지 넘어갈 정치적 위험이 있다.'정태수 리스트'에 대한 수사도 이것이 면죄부를 주는 방편으로 이용될 경우 역시 다음 정권으로 이월되는 정치적 부채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독재를 퇴치한 후 이제 겨우 민주적으로 조금씩 성숙해가는 마당에 이렇게 뒤떨어진 정치행태를 언제까지나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여태껏 대권주자니,따르는 사람이 많은 보스니

하던 정치인마저 돈주었다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정치적 생명이 좌우돼 그의 입만 쳐다보며 울고 웃는 우리의 정치수준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무리 사과 상자에 현금을 넣어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이같은 무모하고 원시적인 방법이 오래 계속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현재 다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정치인이 없을텐데 이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얼마나 더 꾸려나가려고 하는가.한번에 5조원의 비싼 수업료를 내고도 합리적이고 투명한 정치운영의 틀을 새로 짜지 못한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송상현〈서울대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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