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시구에 변화 몰고 온 홍수아의 ‘개념 시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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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08면

1982년 3월 27일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한국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프로야구 역사상 첫 시구자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마운드에 올랐다. 프로야구 출범은 전두환 정권이 내세운 3S(sports, sex, screen) 정책의 신호탄이었다.

프로야구의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듯 초창기 시구자들은 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나 광역단체장 같은 정치인으로 한정돼 있었다. 89년 영화배우 강수연에 이어 96년 탤런트 채시라가 시구를 하기도 했지만, 80·90년대 야구경기 시구는 대개 장관과 시장들의 전유물로 자리 잡아 왔다. 94, 95년 한국 시리즈에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시구를 맡았다.

시구자가 본격적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연예인은 물론 다른 종목 스포츠 스타, 사회 각계각층의 유명인이 마운드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야구장에 잠깐 와서 대충 던지고 가는 데 그쳤다. 시구에 나선 여성 연예인을 보면 굽이 10㎝가 넘는 하이힐이나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신기도 했다. 심지어 치마를 입고 던진 연예인도 있었다. 인터넷에 ‘굴욕 사진’이란 제목으로 민망한 사진이 올라오기 일쑤였다.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폭소를 자아낸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 2005년 7월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잠실 경기에서 홍수아가 시구자로 나서면서 시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유독 홍수아가 조명을 받았던 이유는 선수를 방불케 하는 투구 자세 때문이었다. 홍수아를 필두로 독특한 시구를 선보이는 연예인이 속속 나오고 있다. 댄스그룹 ‘천상지희’의 스테파니는 하이킥 동작으로 ‘찬호파니’란 별명을 얻었다. ‘소녀시대’의 유리는 김병현 선수(플로리다 말린스)와 비슷한 언더핸드 투구 폼을 최초로 선보여 ‘BK유리’란 별명을 얻었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부잣집 마나님 역할을 했던 장미희도 올해 한국시리즈 4차전 시구에 나서 강한 파워를 과시했다. 그는 “과거 시구를 한 적이 있는데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틀 동안 연습을 했다”고 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라고 해서 시구자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상징성 있는 인물이 주로 나온다. 지난해 월드시리즈 1차전은 보스턴의 전설적인 야구 스타 칼 야스트르젬스키가, 2차전은 심장병을 앓는 13세 소년이 마운드에 섰다. 팬들이 공감할 만한 시구자를 통해 야구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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