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핀 두 種의 벚꽃 - 포토맥강가의 일본 벚꽃 아메리칸大 한국벚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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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워싱턴의 봄은 벚꽃이 유난스럽다.특히 백악관에서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포토맥 강가의 제퍼슨기념관 주위에는'요시노''아케보노''후겐조'등 일본계 벚나무 3천여그루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이처럼 일본의 벚꽃이 만발하게된 이유는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부인 때문이다.일본의 조선강점을 묵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미국측 당사자인 태프트 대통령의 부인 말이다.일본에서 생활한 경험도 있는 태프트 부인

은 어느 미국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1909년 워싱턴 일대에 벚나무를 심기로 했고,이를 전해들은 일본인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 (아드레날린 발견자)박사가 두차례에 걸쳐 5천그루를 기증했다.

이 벚나무들은 1912년 처음 심어진 이후 빠른 속도로 워싱턴 일대에 퍼졌다.올해도 어김없이 지난달 30일부터 오는 13일까지 벚꽃제가 벌어지고 있다.1935년에 시작됐으니 63년째다.'전국 벚꽃제'쯤으로 번역되는 NCBF라는 비

영리단체가 주축이다.그러나 이들이 벌이는 행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본색 일색이다.'일본 재즈 콘서트''화가 모리 시즈메 전시회''일본인 요리사의 초밥 만들기 시범''찹쌀떡 쳐대기''샤미센 합주''오리가미(종이접기)와 인형 만들기'등.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도 일본문화가 워싱턴에서 이처럼 마음껏 미소지을 수 있기까지 일본들의 노력은 각별했다.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은 벚나무 주위에 갖다 놓을 석등을 보낸데 이어 종류가 다른 벚나무를 끊임없이 기증해 왔다.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의 우에사와 도시쓰쿠 문화담당관은 일본 정부가 워싱턴의 벚꽃제를 위해 재정적으로 직접 기여하는 바는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한장에 1백달러가 넘는 각종 만찬이나 퍼레이드 행사 참가 티켓을 이런 저런 일본인들이

수백장씩 사들여 왔다.일본대사관의 각별한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워싱턴의 봄은 이처럼 일본 벚꽃 한 빛깔이다.그러나 딱 한군데 한국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곳이 있다.아메리칸 대학 국제정치학과 건물 옆이다.네 그루의 조선 벚나무 옆에 서있는 조그만 동판은 이 나무들이 어떤 연유로 그 자리에

심어지게 됐는지를 말해 준다.'한국 벚나무-원산지를 기념해 이름을 딴 이 나무들은 독립운동가이며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43년 4월8일 폴 더글러스 총장과 함께 심었다.한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는 아메리칸 대학 지

성인들의 관심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상징으로….'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에 있는 조지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았다.그가 왜 굳이 조선의 벚나무를 가져다 심었는지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다.“일본 벚나무는 사실 조선의 것을 가져다 개종(改種)한 것”

이라고 말하면서 일본 벚나무를 도끼로 찍어내고 그 자리에 조선의 벚나무를 심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기도 한다.

포토맥 강가의 일본 벚꽃들이 아메리칸 대학의 조선 벚꽃에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수만그루의 벚나무가,그 벚꽃을 빌미로한 일본의 활갯짓이 부러워서가 아니었다.가미카제로 두들겨 맞아 항공모함이 침몰하고 수많은 미국인이 죽어갔는데도 일본

벚나무를 도끼로 찍어내지 않은 미국이 야속하거나 미욱해 보여서도 아니었다.한국엔'없다'던 일본이 워싱턴에'있었기'때문이다. [워싱턴=이재학 특파원]

<사진설명>

아메리칸대학 교정에 고 이승만 박사가 심었다는 네그루의 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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