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보고세로읽기>촌티는 벗었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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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즘 나라 꼴이 말씀이 아닌데 그 와중에 방송의 추태까지 한몫 거들고 있다.

'별은 내 가슴에'인가 하는 드라마는 아버지가 아들 외도를 시켜주고,어머니는 딸에게 외제차를 선물하는 내용을 방영했는가 하면 심야 토크쇼에서는 칵테일바를 차려놓고 술판을 벌인다고 해 말썽이다.

사실 방송의 추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나 자신 지난해까지 방송위원회의 연예오락심의위원으로 일하면서 그 실상을 몸소 경험했으며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돼 중도에 위원직을 사퇴했다.저질.퇴폐는 이미 방송사의 구조적 증후

군을 형성하고 있다.시청률 높이기에만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논리가 있다.높은 시청률은 곧 대중의 지지를 뜻하며,자본주의.민주사회에서 대중은 곧 제왕이다.대중들이 좋다는데 일부 편협하고 시대에 뒤떨어진'노털'들이 투덜댄들 대수냐

.나아가 그들의 불평은 오히려 프로그램의 성공에 대한 증거로 치부된다.

20~30대 젊은 PD들은 방송위의 경고나 사과명령을 훈장이라도 탄 양 생각하며 그래서'별 달았다'고 자랑스레 여긴다.그들은 시청자 대중밖엔 안중에 없다.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방송에 인기인들을 등장시켜 온갖 신변잡기에서 음담패설까지 늘어놓으며 키득거리고,심지어 교양프로인 건강강좌마저 코미디화하는 요즘 방송의 멘탈리티를 반드시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예전의 방송과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부분이 딱 하나 있다.최소한 촌티는 벗었다는 점이다.

우선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도덕적 촌티를 벗었다.아들의 외도를 장려하는 아버지,혼외정사를 즐기는 주부,혼전순결따윈 코웃음치는 청춘남녀.그 다음 감각적 촌티도 벗었다.외제차를 몰고 스키장을 누비며 최고급 호텔에서 뷔페를 즐기는가 하면

,첨단 의상을 걸치고 통통 튀는 말투에 기성.괴성을 지르고 거침없이 흔들어대고 입을 열었다 하면 시종 농담 따먹기로 일관하는 요즘의 TV를 대하면 방송사들이 전국민의 연예인화에 발벗고 나선 느낌이다.

좋다.촌티를 벗은 것만 해도 확실히 발전이다.그러나 우리가 진정 문화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촌티를 벗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선진외국의 TV를 보자.겉보기에는 하나 다름없이 자유분방해 보이는 10대.20대의 젊은 애들,그러나

그 애들은 우선 깍듯하게 예절바르고 뚜렷한 자기주장과 논리를 지녔다.겉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우리는 어떤가? 행동은 거칠고 머리 속은 텅 비었다.교육의 탓이겠지만 아는 것도 없고,책임감도 없고 반듯한 예절도 모른다.이것이 우리 방송

의 현주소다.

(정진수 성규관대교수.연극연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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