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읽기>異說 무역보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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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달 31일 한국의 소비절약 운동을 또 하나의 수입규제로 규정하는 세계 무역장벽 보고서를 발표했다.이 보고서가 만들어지기까지 서울과 워싱턴을 오간 통상조사관들의 솔직한 대화내용이 녹음됐는데,아마 미국인

들은 요즘 서울에서 녹취.녹화가 유행중인걸 몰랐던 모양이다.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소비절약 운동은 자연히 수입 소비품을 줄이자는 운동으로 연결된다.한국 정부가 이 운동을 부추기는 것은'소비는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부정하는것 아닌가.”

“한국 정부는 민간의 자발적 운동이라고 말한다.한국인들은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절약 없이는 부자가 못 된다고 이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의 최고 정치 지도자들이 모여 절약운동을 펴자고 맹세했다는데 정부가 부추기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

“정당 총재님들이 모여 그런 맹세를 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들은 지금의 경제위기 원인이'본질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만연된 불신풍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들이 누구라는 지적이 있었는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우리들'이라는 지적이 없었단 말인가.”

“없었다.”

“좀 안심이 된다.그러면 한국 언론과 사회단체가 문제일텐데….”

“그들은 나라 경제를 일으키자는 자구(自救)운동에 시비를 걸면 내정간섭이나 주권침해로 규정하고 해당국의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르렁댄다.”

“그점에서 한국인들을 좀더 이해시켜야 한다.미국은 지난해 일본에서 4백77억달러,유럽에서 1백52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봤다.유럽과는 대화가 좀 버겁고,일본은 너무나 매끈해서 통상협상때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하고 있다.그래도 우리 처지를

알아주는 것은 혈맹(血盟)한국뿐이다.쌍둥이 적자에 허덕이는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라.”

“한국인들은 잘 알려진대로 통이 크다.과히 걱정은 안해도 된다.한국인들은 이미 미국산 녹용.웅담.모피.골프채의 최대 소비자다.그들이 일단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김포공항은 세계에서 모인 진품 명품의 전시장이 된다.그뿐인가.영국의

위스키,프랑스의 포도주,말레이시아의 뱀도 그들이 싹쓸이로 먹어 치운다.한마디로 그들은 봉이다.아차,이 말은 절대 한국인의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

“한국의 서비스업 장벽은 아직도 완강하다.화장품 광고조차 심의한다지 않는가.”

“그것도 뚫린다.상위체위에 능한 샤론 스톤이 등장,교태(嬌態)를 지으며'강한 걸로 넣어 주세요'하는 광고가 있다.실내섹스에 능한 데미 무어가 등장하면 인기를 끌 수 있겠다.주지사(州知事)를 파견,홍보하면 더 좋고….”

“부자나라 행세를 해온 한국인들이 왜,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각종 경제지표가 멕시코 외환위기를 닮아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그러나 이것도 엄살이 섞인것 같다.최대 저축장려기관인 한국은행은 절대로 멕시코의 재판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비억제보다 수출 경쟁력 향상이 난국탈출의 지름길일텐데….”

“그런 근원적 처방은 당분간 한국인의 실력으론 어렵다.이 말도 한국인의 귀에 들어가면 안된다.”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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