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리더십의 증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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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고 있는 한국경제의 성적표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97년3월말 현재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평가대상 46개국중 31위로 평가했다.95년의 25위,96년의 27위에서 4~6단계나 추락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영국의 국제금융전문월간지'유러머니'의 최근 조사결과를 보면 작년 9월에만해도 12위였던 한국의 경제성적이 97~98년에는 18위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추락하는 한국경제에는 날개도 없는 모양이다.

이제는 지쳐버렸는지“큰일났다”고 하소연하거나 푸념하는 소리도 잦아들었다.누구를 원망하거나 욕하는 사람들도 크게 줄었다.경기가 나쁜 것은 전반적인 현상이어서 두드러지지 않아서 그렇지,출판계도 근년에 없는 불황속에서 허덕이고 있다.올 1월의 종수나 발행부수는 지난해는 물론 지지난해보다도 감소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던 대형 단행본 출판사인 고려원이 끝내 쓰러진 것이 요즘 출판계의 불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고려원만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현재는'반짝 특수'기간인 신학기철이어서 겨우 겨우 숨을 이어가고 있지 4월에 들어서

면'부도가 날 출판사와 서점이 줄을 섰다'는 섬뜩한 소리도 출판계엔 나돌고 있다.

이런 불황의 원인이 단지 전반적인 경기침체 때문이라면 출판계만 중뿔나게 앙앙불락할 일도 아닐 것이다.그러나 출판불황의 원인이 단지 경기침체에만 있는게 아니다.소설 이상으로 재미있는 요즘의 정치상황이 출판계를 더욱 더 불황의 늪속으로 깊이 빠뜨리고 있으니 사회의 다른 어느 부문보다도 출판계가 오늘의 사태를 빚은 현 정권과 정치권을 향해 종주먹질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 신문도 너무나 흥미진진하다.내일은 또 무엇이 폭로되고 무엇이 밝혀질지 인기 연속 방송극처럼 신문이 기다려진다.세상이 이렇게 재미있게 돌아가버리면 출판계는 절망적이 된다.가뜩이나 책을 안 읽는 국민이다.좀 과장해 말하면 우리 국민은 서른살만 넘으면'문화'와 담을 쌓아버린다.가장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영화마저 멀리하는 형편인데 더 어렵고 딱딱한 책을 어찌 접하랴.더구나 신문에는 매일같이 삼국지 못지 않은 사연들이 즐비하고 보면 누가 책을 살 것인가.

우리 사회가 경제침체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진짜 걱정은 경기침체 그 자체가 아니다.경기침체야

찾아올 수 있다.미국이나 일본도 근년에 우리 못지 않은 경기침체를

경험한바 있다.경기침체 이상가는 더 큰 문

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내일을 개척할 리더십을

갖추지 못한데 있다.

리더십만 확립돼 있다면 다시 뛰지 못할 것도 없다.폐허에서도 오늘을

만든 우리들이다.다시 머리를 모으고 가슴을 맞대면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머리를 모으고 가슴을 맞닿게 할 지도력의

부재(不在)로 하릴없이 아까

운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꼭 집에 불이 났는데 식구들이 합심해서 불을

끌 생각은 않고 둘러서서 발만 동동 구르며 누가 불을 냈느냐고 책임만

따지고 있는 격이다.

그런 리더십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기대하기는 이미 어려운

상황이다.현재 金대통령에게 기대할 수 있는게 있다면 이제라도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오늘의 사태를 빚은 전말을 속속들이 밝혀 우리 사회를

한시라도 빨리'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그래야 우리 사회도 살고,金대통령 부자도 살 수 있다.

金대통령이 더 이상 우리 사회의 구심점이 될 수 없다면 그 큰 공백을

메워야 할 사람은 여야의 대선주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수많은 대선주자들마저 적어도 아직은 전혀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이'한보'며'김현철'이며를 왜 캐어들어가고 있는가.복수를 위한

것인가,흥미를 위한 것인가.복수를 위한 것도,흥미를 위한 것도 물론

아닐테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치 그것을 위한 것처럼 돼 출판불황만

가중시키고 있다.

YS가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원인은 대략 두가지라고

본다.하나는 92년에 엄청난 대선자금을 쓴데 있고,다른 하나는 경제를

요리할 능력이 부족했던데 있다.그렇다면 현재의 대선주자들은

어떤가.법정선거비용만으로 선거를 치를 자신이 있는가.경제는 어떻게 소생시킬 것인가.대선주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국가경영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현재처럼

권력분할에만 눈이 어두워서는 5년뒤에도 오늘과 똑같은 정치적 위기가

재현될 것이다. 유승삼 (출판법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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