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원지의 남편 구환은 유선 방송국 사무실 내의 기술적인 문제들을 맡아 처리할 뿐만 아니라,유선 방송을 신청하는 집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 가입비를 받고 75옴(ohm)동축선을 연결하는 일을 해주기도 한다.유선 방송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고장신고가 들어와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 고장 원인을 찾아 수리를 해준다.그리고 가입비나 시청료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다른 집 선을 끌어다 쓰는 사람들이 발각되면 응분의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아내 원지는 전문대 다닐 때 만나 6년 가까이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였다.원지는 유아교육과였고 구환은 전기과였다.

구환은 지금 아내 이외에 사귀는 다른 여자가 있다.그 여자를 알게 된 것도 지난 봄 유선 방송 신청을 받고 동축선을 설치해 주려고 갔다가 그렇게 되었다.대개 직원 하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달려가는데 그날은 그 직원이 집안의 경

조사 때문에 나오지 않아 구환 혼자 그 여자의 집으로 갔다.

그 여자는 독신녀로 전화교환원이었다.전세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전세방이라는 것이 4층 주인집 건물 옥상 위에 가건물 비슷하게 지어진 소위 옥탑이라는 데였다.그 옥탑 전세금도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구환은

간편한 체육복 차림으로 있는 그 여자를 빈궁하게 보지는 않았다.

옥상으로 동축선을 끌어올리느라 혼자서 꽤 고생을 한 후에 텔레비전과 연결시키려고 그 여자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구환은 방안이 신혼살림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전자제품들과 고급스럽게 디자인된 가구들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

고 적이 놀랐다.보아 하니 혼자 사는 여자 같은데 돈이 좀 있는 어떤 남자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죠?”

유선 방송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방금 이사를 온 경우가 많아,구환이 동축선 끝을 쥐고 텔레비전으로 다가가면서 슬쩍 그렇게 물어보았다.

“아뇨.이사 온 지는 꽤 돼요.좀 심심해서요.”

그러면서 여자는 자기 직업이 전화교환원임을 밝혔고,삼교대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아 낮에 방안에서 빈둥거릴 때가 종종 있어 유선 방송이나 볼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사 오자마자 신청을 하지 않고.”

구환이 텔레비전을 돌려놓고 쪼그리고 앉아 동축선 끝을 찌로 끊어내면서 훑어 올려 구리심 하나가 뾰족하게 나오도록 하였다.

“그 동안은 낮에도 심심하지 않았어요.”

“혹시 사귀던 애인이랑 헤어진 거 아니예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