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한국금융>下.형식뿐인 감독기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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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12월 한보철강이 1백억원대의 어음을 막지 못하는 바람에 은행감독원에 보고했습니다.'주거래은행도 아닌 처지에 부도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전하더군요.그래서 신규대출을 일으켜 막았습니다.”(모 시중은행장)

행장은 점잖게 은감원의'의견'으로 표현했지만 실제론 구제금융 지원여부에 대한 지침이다.감독기관으로서 은행의 건전경영을 위한 지침이 아니라 부도를 낼거냐,계속 지원할거냐에 대한 판단을 내려줬다는 얘기다.

은감원이나 은행이나 다 익숙한 관행으로 그렇게 해왔다.'금융가의 황제'로 군림했던 5공의 이원조(李源祚)원장 시절때는 그 절정기였다.실세 권력자가 버티고 있었기에 은행들은 군말 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더구나 금융의 최종적인 감독권한도 재정경제원이 쥐고 있다.은감원의 지침도 실상은 재경원.청와대등으로부터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은감원은 창구쯤으로 인식되고 만다.은행도 은감원의 감독보단 은감원을 통해 전달되는 정부의 지침에 더 귀를

기울인다.이러니 은감원의 감독은 겉돌 수밖에 없고'감독 따로,지침 따로'식의 운영이 되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이원조'도 없어졌다.어찌보면 은감원의 파워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셈이다.그러나 대형 금융사건이 터질때마다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최연종(崔然宗)부원장의 불만은 이런 과도기적 고민을 잘 보여준다.

“은감원은 감독기관뿐만 아니라 은행장이나 주주의 역할을 요구받는다.행장은 부도가 날 상황이 돼서야 책임을 면하려고 은감원에 달려온다.은감원엔 권한은 없는데 책임만 돌아온다.”

과도기에 한보사태가 터지자 즉각 권한의 공백상태가 드러났다.은감원은 예전처럼 확실히 나서 교통정리를 하려 하지 않았다.그전 같으면 은감원이 했어야할 일을 결국 청와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은감원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본연의 감독기능을 살려내려면 아직도 멀었다.허상(虛像)은 슬슬 걷혀가고 있지만 실상(實像)은 미처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은감원은 면피론을 내세울 때마다 재경원을 자주 걸고 들어간다.역대 원장의 절반이상이 재경원(옛 재무부)출신이다.증권.보험감독원도 재경원 출신이 요직을 맡고 있어 실질적인 산하기관화 돼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은행이 그랬듯이 은감원 역시 외압탓만 할 수 없게 돼있다.감독체계 문제 이전에 주어진 기능 역시 제대로 수행됐는가 하는 것이다.한보사태 관련 은행에 대한 특검만 봐도 그렇다.당초 중점조사대상중 하나였던 대출금 유용에 대해선

전혀 밝혀내지 못했고 은감원 검사기간중 일어났던 여신에 대해서도 부실화되지 않았다고 그냥 넘어갔다.

은행쪽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지난해 터진 증권감독원 비리사건에서 보았듯이 다른쪽 감독기관 실상은 더 문제인게 현실이다.감독기관을 또 감독하는 곳을 더 만들어야 할 판이다.

기술적인 차원을 봐도 경영지도 위주의 감독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은감원이 지난해 뒤늦게 도입해 제일.조흥은행을 상대로 시험실시한 미국의 선진감독제도인 카멜(CAMEL)도 한보에 대한 편중여신을 막지 못했다.과거

에도 은행의 경영건전성을 들여다 본다고는 했지만 건수 위주의 적발에 더 비중이 두어졌던 탓에 은감원은 얼치기 수사기관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해 왔다.

“개선되고는 있지만 은감원은 사소한 위규.위반 적발에 집착하는 인상이다.미국등 선진국은 검사의 80%이상을 자산건전성 측정에 초점을 둔다”(아메리카 익스프레스은행 서울지점 白碩寅전무)는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찌른 것이다.

은감원의 인적 구성이나 질에 대한 지적도 있다.은행경영이 복잡해지고 거래규모도 커져'적발도사'들의 노동집약식 검사로는 경영지도가 곤란하게 됐다.기능적 검사에 익숙해 있는 은감원 인력으론 경영지도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얘기다.은감원

내부에서도 검사인원의 20~30%는 자금.국제.조사등의 업무경험이 풍부한 한은(韓銀)출신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관리는 은행에 맡기되 은감원은 그 수단이 적정한지만 엄격히 체크하자는 의견(금융연구원 尹碩憲박사)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물론 잘못된 위험관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은행에 엄격히 지운다는 정부의 원칙이 전제돼야 현

실성을 지닐 수 있다.이는 선진국처럼 은행의 자율은 인정하되 잘못되면 그냥 쓰러지도록 하자는 주장이기도 하다.

감독이 철저하면 은행에 가해지고 있는 각종 규제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걷어낼 수 있다.말썽 많은 대기업의 은행소유 문제도 감독기능에 대한 신뢰확립이 전제돼야만 가능한 일이다.누가 은행을 소유.경영하든 은행경영에 대한 엄격한 감시가

이뤄지고 편법.불법을 견제할 수만 있다면 많은 시비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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