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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잡아라>그녀 입술을 훔친다?-립스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H은행 최영식(45)지점장은 여직원들의 립스틱때문에 한동안 겪었던 '마음 고생'을 요즘들어서야 털어버릴 수 있게 됐다.오랜만에 붉은기가 감도는 연분홍색의 립스틱을 대다수 여직원들이 바르기 시작한 덕분이다.

그동안의 색깔들은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그에겐'푸른빛 도는 립스틱은 동상(凍傷)에 걸린 색''베이지색상은 몸살로 입술이 다탄 색'이었을 뿐이었다.특히 지난해 가을 대유행을 했던 고동색은 마치'시체색'으로만 보였다.

“밝게 보여야 고객들이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돌려서 말해 봤지만“아니 웬?지점장님은 유행도 모르시나봐요”라는 면박만 받기도 했었다.

아직도 崔지점장은 이같은 립스틱 유행을 다른 유행들처럼“그저 돌고 도는 것”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유행의 뒷면에는 판매량을 늘리려는 기업들의 마케팅전략이 도사리고 있다.

“유행은 사실 기업들이 일으키는 셈이지만 쉬운 것은 아닙니다.소비자들의 심리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고도의 마케팅.판촉.광고전략이 뒤따라야 유행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이죠.만약 다른 회사가 선택한 색상이 유행으로 뜨면 엄청난 돈만

날리는 한판의 도박과도 비슷합니다.”(태평양 나인석 부장)

립스틱 유행에 마케팅전략이 도입된 것은 93년가을 벌어진 태평양의'밍크브라운 캠페인'부터다.각자의 개성이 강한 외국과 달리 국내 소비자들은'립스틱=붉은색'이란 등식에 얽매어 있어 이를 깨지 않고선 판매량을 늘릴 수 없다는 선두업체

의 고민 때문이었다.다시 말해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붉은 색조의 신상품들을 아무리 내놓아 봤자 큰 차이를 못느낀 소비자들은 쓰던 립스틱이 다 닳을 때까지 쓴다는 점이다.밍크브라운은 바로 제품의 자연적 수명이 다해 일어나는 교체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유행을 일으켜 수명을 단축시키는 '의도적 진부화 전략'의 산물인 것이다.

당시 세계의 패션유행색으 보이는 붉은 색조의 신상품들을 아무리 내놓아 봤자 큰 차이를 못느낀 소비자들은 쓰던 립스틱이 다 닳을 때까지 쓴다는 점이다.밍크브라운은 바로 제품의 자연적 수명이 다해 일어나는 교체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의

도적으로 유행을 일으켜 수명을 단축시키는 '의도적 진부화 전략'의 산물인 것이다.*** [ 36면'립스틱'서 계속 ]

당시 세계의 패션유행색으로 지목된 번쩍이는 고동색을 목표색으로 정한 태평양은“그런 색을 누가 바르겠느냐”는 내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광고물량에 힘입어'유행화'에 성공했고 덕분에 한달만에 2백만개를 팔 수 있었다.하지만 소비

자들에게는 다음해 봄 밍크브라운 대신 태평양이 또다시 내놓은'트로픽 오렌지'라는 색상의 립스틱을 사야 하는 포로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될 것같이 보였던 선두업체 태평양의 환호성도 잠시였다.경쟁업체인 LG와 한국화장품도 잇따라 똑같은 전략에 나섰기 때문이다.실제로 스산했던 그해 가을 검자주색의 선정적인 분위기에다 당시 유행하던 재즈콘서트에서 이름을 딴 LG의

재즈와인은 태평양이 내놓은 을씨년스런 빛깔의 미스티퍼플을 보기 좋게 꺾어버렸다.이후 게임의 양상이“어느 회사가 유행색을 맞추느냐”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이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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