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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의 국어 성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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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0여년 전 '농무(農舞)'의 시인 신경림씨가 경상북도의 한 중학교를 찾아갔다. 그 학교의 전교조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고 한다. 신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교사들이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참고서에 나오는 국어 시험문제를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신씨의 작품 '가난한 사랑 노래'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하는 시에 대한 객관식 문제 10개를 신씨가 즉석에서 풀었다. 결과는 겨우 30점. 세 문제밖에 맞히지 못한 것이다. 중.고교의 '죽은 문학교육'을 개탄할 때 문인들이 자주 거론하는 일화다.

'택의 등반작업이 잠깐 그치면 귓전에서 정적 특유의 지잉 하는 소리가 희미한 허공에서 온 바위 위로 뒤덮여 내렸다. 밤의 땅은 무섭도록 요염했다. 투박한 바위들과는 정반대로 희미한 은띠 같은 강줄기와 화려한 색등의 깜박거림, 도시의 줄이은 등불의 행렬, 가끔 천천히 별이 흐르듯이 비행기가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경복고 2학년생 황석영에게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안겨 준 소설 '입석부근(立石附近)'의 한 구절이다. 이미 평범한 고교생의 글이 아니다.

작가 오정희가 1964년 이화여고 2학년 때 교지에 실은 단편 '노래기'는 또 어떠한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질을 하자 잇몸에서 아릿한 아픔과 함께 멍울이 투욱 터지는 듯한 느낌이 왔다. 칫솔을 빼고 입 안 가득한 것을 뱉어냈다. 분홍색으로 변한 치약거품이 꽃처럼 흐르며 번져갔다.' 많이 읽고 써본 학생 문사(文士)의 저력이 문장마다 배어 있다.

물론 반론도 많다. 지금은 더 이상 '학원문학상'이나 신춘문예를 선망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흡수하는 정보의 양과 질은 오히려 요즘 학생들이 60~70년대 학생보다 낫고, 흡수 방식도 다양해졌다는 말이다. 일리 있다. 이화여대 국문과 김미현 교수도 "요즘 애들도 많이 읽는다. 또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문화수준이 높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김교수의 다음 말에 귀기울이자. "요즘 학생들은 정보 중심의 독서 탓인지 깊이나 통찰력 면에서는 처지는 것 같다. 한 책에 대해 1, 2분 정도 말하고 나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자기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이 모자란다." 요컨대 '자기 말을 하는 방법, 고민하는 방법'에 약하다는 말이다. 경희대 최혜실 교수도 동감이다. "즉발적.감각적인 글을 선호하는 반면 어떤 주제를 곱씹어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능력은 약해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 대신 기존의 정보를 재조합하는 수완은 '놀라 까무라칠 정도'라고 한다. 정리하자면 김승종(전주대)교수가 '한국 대학 작문교육의 실태와 발전방향' 논문에서 진단한 것처럼 '디지털 매체가 도입된 이후 대학생들의 작문 실력은 약화되었고, 디지털 매체가 요구하는 즉각적 반응에의 의존도가 커짐에 따라 읽고 쓰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된 듯하다.

시대는 엄청 변했다. 독서와 작문을 북돋는 환경 면에서 옛날이 더 좋았을 리도 없고,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더더욱 당치 않다. 그러나 대입 논술시험이라는 실낱 같은 수단만으로는 부족한 게 분명하다. 자라나는 세대가 일상생활에서 읽고 쓰기를 즐기게끔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육당국에 주문해 보았자 입만 아플 것이다. 우선 자기 아이들부터 일찌감치 독서 습관에 푹 젖도록 가르치자.

노재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