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풀스토리>上.제자 김정일의 홀대에 주위서 동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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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는 그 흔한 김정일(金正日)의 비밀파티에도 초청받지 못했다.성격이 워낙 깔끔한데다 김정일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고위간부였다 귀순한 한 인사는 김일성(金日成) 사후 틀어진 김정일과 황장엽(黃長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권력의 핵심에서 점차 멀어지던.주체사상의 대부'로서의 화려한인생역정은 망명이란 종점에 다다랐다.
일제시대 한 일본회사의 사무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후 소련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조국재건의 꿈을 키웠다.그는 최근어려움을 겪으면서 측근들에게 자신의 소련유학 시절을 자주 회고하곤 했다.“그때가 좋았지.” 그는 90년대 들어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유학시절 연애 결혼한 부인 박승옥씨는 북한이 자랑하는 여성 인텔리.그녀는 특히 영어.러시아어등 외국어에 능통,평양외국문종합출판사에서 번역업무를 담당해왔으며 최근엔 황장엽의 일을 도운 것으로 전해진다.
***파티에도 초청 못받아 자녀들도 모두 소문난 영재들이라 귀순자들 상당수가 그 존재를 알고 있다.당연하겠지만 그가 망명자술서에서 결연한 의지를 밝히면서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지 못한 것은 처와 자녀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그가 권력핵심을 향 해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59년 김일성 철학부문비서를 맡으면서부터.이때 두터운 신임을 받아 65년 김일성대 총장에 발탁됐다.한 귀순자는 알려진 것과 달리 황장엽이 당비서가 되는 80년까지 줄곧 김일성대 총장을 지냈다고 말했다.물론최고인민회의 상설의장이란 공직 때문에 학교일에 전념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에 대한 그의 애착은 상당했었다는 전언이다.당시 대학총장 업무는 지창익 당시 제1부총장이 맡았다.
총장 재직시엔 사회주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관한 박사논문이 김일성 사상에 위배됐다는 이유로 한때 비판받았으나 별 탈은 없었다.그만큼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교수와 학생들을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는데 앞장섰다.김일성대를 북한 교육의 최고 전당으로 민족 간부 양성 기지화해 김일성 부자의 친위대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 사망 얼마전부터 개혁.개방의 길을 암중모색했다.92년 그의 사위이며 주체과학원 산하 정책연구소 부소장인 김모(49)씨에게 자본주의 체제와 이념연구를 지시했다.黃이끔찍이 아꼈던 사위는 20여개 자본주의 국가를 돌면서 꾸준히 관계자료를 모으고 분석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장엽은 김일성의 외국 나들이때는 연설문 작성등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수행했다.그가 중국에 첸치천(錢其 ) 현 외교부장을 비롯한 많은 지인들이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고 망명 결행을 중국에서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그가 한국 행을 비교적낙관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황장엽에 대한 김정일의 홀대는 상당했다.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사람에게 지나치다는게 여론이었다.그의 부인은 절친한 한 고위층 부인에게 김정일을.그 얘'라고 지칭하면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없는 북한체제에서 黃은 그저 명예퇴직의 날을 기다리는 한 원로정치학자였을 뿐이었다.김일성에 대한 그의 총애가 각별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북한체제를 걱정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는그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그에 대한 인물 평은 엇갈리고있다.성격은 침착하면서도 깐깐하다는 평이다.말이 적고 좀처럼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대인관계에서는 온화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란 평가와 함께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친구가 없다는말도 있다.
정치적으론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업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성실성.집념이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그러나 역시 정치적인 야망이나 비전은 갖추지 못했다.
96년 이후 최근까지 그는 북한 권력 중심부에서 사실상 밀려나 있었다.그가 북한의 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참석한 일본의 국제학술회의는 공교롭게도 주체사상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이영종 기자><사진설명>김일성과 함께 김일성이 87년 7월 제5차.4월의 봄 친선 예술축전'에 참가한 예술인들을 만날때 동행한 황장엽(왼쪽에서 두번째).
[북한 발행 천리마 8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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