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술서로 본 황장엽 망명 동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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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에 망명을 요청한 북한 노동당 황장엽(黃長燁)비서는 자신의 결정이 북한체제에 대한 염증,권력투쟁 실패등.일신상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남북간의 극한대립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키 위한 것이라고 망명동기를 밝혔다.한국에 .건너 와'직접대화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가 베이징(北京)주재 한국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직후 작성한 진술서에서 밝힌 이런 내용은“74세의 노인이 뭣 때문에…”라는 등 많은 이들이 지닌 의아심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준다.
黃비서가 자신의 행위와 관련해 가족들에게“이제 황장엽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 주기 바란다”며 비장한 심정을 토로한 뒤 남과 북의 서로를 향한 자세에 강한 불만을 털어놓은 것도 이를뒷받침한다.분단된지 반세기가 넘도록 통일을 한다 고 떠들면서 서로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등 남북 양쪽을 모두 싸잡아 비판한 황장엽이“마지막 순간까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라는 심정을 토로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黃비서의 진술내용에 대해 일부 정부관계자들은 당혹감을감추지 않는다.통일원 당국자는 그가 김정일(金正日)체제에 대해.다소의'비판을 가하고는 있지만 북한이 붕괴될 위험이 없다는점을 지적하는 등.애정'을 담고 있는 게 주목 된다고 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민족과 역사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뜻은 이해가 가지만 북한체제에 대한 극도의 불만 없이 이런 엄청난 일을 감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노학자의 낭만적 행동일 가능성도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극한대립으로 치닫는 남북현실에 대한 환멸,암울해져 가는 북한의 실상에 대한 허탈감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어떤 역할을 해보겠다는 심리가 발동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역시 미심쩍다는 얘기다.
물론 세미나 참석차 도쿄(東京)를 방문한 그가“세미나 성과가무엇이냐”는 질문에“평화”라고 답변한 점등을 감안하면 굳이 따질 것만은 아니다.이같은 黃비서의 심정이 진정이라면 이는 48년4월 김구(金九)선생의 평양행과 비교된다는 일 부 지적도 있다.김구 선생은“3천만 형제가 한없는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며 평양에 갔다.물론 그의 행적을 김구 선생의 그것에 빚댄다는 것은 어불성설(語 成說)이다.그러나 黃비서가 이와 같은 심정을 갖고 망명했다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바가 실제로 이뤄질지는 전혀 미지수다.

<안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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