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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동맹, 지는 동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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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쟁 덕에 헤로도토스는'역사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스인과 이민족의 극심한 전쟁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고 그는 '역사'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현상의 본질이 전쟁에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였다. 1968년 미국의 저술가 윌 듀런트는 그 이전 3421년 동안 세계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68년에 불과했다는 계산을 내놓기도 했다. 긴 전쟁과 짧은 평화의 끝없는 반복이 역사란 뜻이다. 냉전 50년 만에 찾아온 반짝 평화가 끝나기 무섭게 인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테러와의 전쟁'에 내몰려 있다.

전쟁 방지에 대한 인간의 성찰은 합종(合縱)과 연횡(連衡)으로 대별되는 동맹이론을 발전시켰다. 아테네에 맞서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시작으로 무수한 동맹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동맹을 떠받치는 기둥은 억지력과 공동 방위다. 동맹은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고, 비용과 효과를 따져 역할 분담이 가능할 때 성립한다. 냉전 시절 미국은 전 세계 약 50개 국가와 공식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공산 독재체제에 맞서 자유세계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건 '반공(反共)'동맹이었다. 봉쇄정책을 통해 소련과 중국의 세력 확장을 막고 유사시 공동 대응하는 것이 미국이 이끄는 자유.반공 동맹의 목적이었다. 한.미동맹도 그중 하나였다.

전쟁의 끝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다. 냉전은 끝났고, 동맹질서의 변화는 불가피한 현실이 됐다. 미국에 9.11 테러는 동맹질서 재편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키를 흔들어 알곡에서 쭉정이를 골라내듯 안보환경과 세력관계의 변화에 맞춰 동맹의 등급을 새로 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동맹관계 '정화(淨化)'작업이다. 또 미국은 냉전 시절처럼 전(全)방위적 동맹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수시로 편성되는 특수 동맹관계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목적이 동맹을 규정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동맹질서에서 최상위 등급을 차지하는 그룹을 '핵가족'이라고 부른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의 보호를 받는 동맹국들이다. 냉전 시절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과 일본.필리핀.호주와 함께 한국도 핵가족에 포함됐었다. 그러나 재편된 질서에서는 영국과 스페인을 제외한 나토 회원국 대부분과 한국.필리핀이 빠지고, 대신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체코가 추가됐다고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국제안보프로그램 소장인 커트 캠벨은 밝히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기준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미국 입장에서 동구권이 뜨는 동맹이라면 한국은 지는 동맹이다. 북한을 다루는 데 공통기반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일부 병력의 이라크 차출 결정으로 촉발된 주한미군 감축 논란이 분분하다. 미군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한.미동맹에 대한 미국의 인식변화가 반영된 결과임에 틀림없다. 반공 동맹이 의미를 잃고, 남북 화해.협력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한.미동맹 관계가 종전과 똑같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원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한.미동맹 관계의 조정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위협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 남북 간 신뢰회복을 통한 전쟁 방지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다. 오는 26일 처음 열리는 남북 장성급 회담은 신뢰구축을 위해 무한한 상상력을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사를 다시 쓰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배명복 순회특파원<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