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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의 잃어버린 詩 찾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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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구사하며 평면적.일상적 삶을 영원성의세계로 끌어올리고 있는 원로시인 미당(未堂)서정주(徐廷柱.82)씨.스스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잃어버렸던 시가 대거 발굴됐다.문학평론가 최현식씨는 이달 중순께 나올 평론 전문 계간지.한국문학평론'창간호에 미당시 15편을 발굴,소개했다. 1945~55년에 쓰여진 이 시들은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됐으나 미당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려 어떤 시집이나 전집에도 실리지 못했다.이 시절은 미당에게 있어서 식민지 지식인으로 원죄의식과 관능에 몸부림 치던 첫시집.화사집'의 세계 를 지나 동양적.불교적 영원성의 세계로 나아가던 때.때문에 미당 시세계의변용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적 가치도 지닌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솔나무 나막신에 홍당목 조끼 입고/생겨나서 처음으로 세배가는 길이었다.//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만세 부르다가 채찍으로 얻어 맞고/학교에서 쫓겨나서 모자 벗어 팽개치고/홀로 고향으로 돌 아가는 길이었다.//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풍월(風月)팔아 술 마시고/좁쌀도 쌀도 없는 주린 아내 곁으로/황토재의 언덕을넘어가는 길이었다.//시방도 나는 눈을 보고 있다./거느린 것은 한떼의 바람과/형체도 없는 몇 사람 의 망령뿐,/인제는 갈데도 올데도 없는/미련한 미련한 운율의 실무조장이여.//눈을 보러 눈을 보러 온 것이다.나는/해마다 내려서는 내 앞에 쌓이는/하이얀 하이얀 눈을 보려고/까닭 없는 이 땅을 다니러 온 것이다.' 48년 2월24일자 평화일보에 발표한.눈'전문이다.천성적으로 타고난 시인의 심성을 그대로 그려보이고 있는.자화상'같은 시다. 그러나 하이얀 눈,순수,그리움만 바라보려한 시인에게 일제와 좌우익 대립은 무언가를 강요했음을 이 시는 또한 내비치고 있다.좌우 대립의 폭발점인 6.25를 맞아 미당은 거의 반 미친 상태에 빠졌다. 공산당이.너를 죽이겠다'는 환청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하려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도움으로 통영에 내려가 휴양하며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나서.무등을 보며'나.상리과원'같이 온전한 평온,대긍정적 세계를 노래한 절창을 얻을 수 있었다..밤'.통곡'.춘향옥중가'.선덕여왕찬'등 이념의 혼란기,사회적 격동기에 쓰여졌다이번에 발굴된 15편의 시는 미당이 어떤 갈등을 거쳐 대긍정,영원성의 세계를 얻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 발굴 소식을 접한 미당은“작품을 따로 스크랩하거나 모아놓지 않은 버릇 때문에 잃어버린 시를 반세기만에 다시 찾아줘 고맙고도 기쁘다”고 했다. <이경철 기자> 까마득하게 잊었던 시가 발굴돼 반갑다는 서정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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