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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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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녀의 스펙(자격조건)은 환상적이다. 외국어는 동시통역 수준이고 비행기 조종도 가능하다. 명인에게 직접 전수받은 요리 비법을 뽐내는가 하면 나중에는 핵(核)연료 취급 자격증까지 내민다. 마케팅 실력도 달인이다. 국회의원 3명을 당선시킨 유세 실력으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순식간에 팔아치운다. 항상 정규직들의 콧대를 납짝하게 만드는 그녀는 비정규직의 자존심. 딱 잘라 계약기간 3개월만 일하고, 울며 매달리는 회사를 미련없이 떠난다. 그리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로 날아가 인생을 즐기면서 다음을 대비한다.

물론 실존 인물은 아니다. 일본 드라마 ‘만능 사원 오마에-파견사원의 품격’에 나오는 주인공 이야기다. 올해 초 국내 케이블TV에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일류 은행의 정규직에서 정리해고된 주인공 오마에는 뼈를 깎는 단련 끝에 만능 비정규직으로 변신한 인물. 하지만 이 드라마가 공감을 얻은 것은 주인공보다 조연들 덕분이다. 정규직에 무시당하고 잔심부름이나 하는 소심한 비정규직 여사원들을 통해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드라마는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마지막 회 시청률이 26%가 넘는 대박이 났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들인 고타로가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도 양념 구실을 했다.

현재 일본의 비정규직은 1700만 명이다. 근로자 3명 중 한 명꼴이다. 상당수가 저임금에다 3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고용불안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절대적인 지지층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사회에 심각한 메시지를 던지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800만 명이 넘는다. 비중만 따지면 전체 근로자의 60%다. 일본보다 두 배나 높다. 그런데도 국내 드라마는 여전히 ‘출생의 비밀’에 치중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간신히 독립영화에나 등장할 뿐이다.

경제가 어려우면 사회적 약자부터 고통받는다. 일본 정부는 나흘 전 긴급고용대책본부부터 설치했다. 후생노동상은 “비정규직을 함부로 자르는 기업에는 강력 대처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청년실업만 부각시키는 느낌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사용기간 제한(현행 2년)을 놓고 옥신각신할 뿐이다. 11·3 경제난국 종합대책에도 비정규직은 부동산·감세에 밀려 딱 두 줄만 언급됐다. 결국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인 만능 사원이 되기를 강요하는 것인가. 비정규직에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