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駐佛 美대사 파멜라 해리먼 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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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뇌출혈로 급작스럽게 타계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파멜라 해리먼의 유해가 8일 워싱턴으로 돌아왔다.13일 장례식을 치르고86년에 숨진 세번째 남편 애버럴 해리먼의 곁에 눕기 위해서다. 해리먼이 사망하자 그녀의 화려했던 남성편력이 새삼스레 화제가 되고 있다.그러나 그녀의 삶이 남성편력으로만 끝났다면 프랑스 대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로널드 레이건대통령 등장이후 몰락 일로를 걷던 민주당을 재건해낸 대모(代母 )이기도 했다.남편의 도움으로 워싱턴 조지타운에 자리잡은 저택에 매일 민주당 인사들을 초대해 토론을 벌이고 정치자금을 거둬 민주당과대통령 후보에게 지원했다.빌 클린턴대통령과의 인연도 8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리먼은 1920년 영국의 귀족으로 태어났다.아버지는 에드워드 딕비 남작.영국 남부 도시의 1백80만여평 저택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39년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의 며느리가 되었다.처칠 총리의 아들로 똑 똑했지만 돌출적인 성격의 랜돌프 처칠은 우연히 이뤄진 첫 데이트에서 청혼했다.해리먼은 결혼한지 꼭 1년만에 유일한 후손 윈스턴 스펜서처칠 3세(현 영국 하원의원)를 낳았다.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랜돌프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술과 도박으로 탕진했기 때문이다.깔끔하지 않은 출발탓이었을까.해리먼의 남성편력이시작된다. 첫 외도 상대는 마지막 남편인 애버럴 해리먼이다.43년 억만장자 외교관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특사였던 해리먼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두사람은 사랑에 빠졌다.처칠과 루스벨트도 두나라의 우의를 다지는 계기라며 이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두사람의 사랑은 공개적이었다.이후 애버럴은 71년 파멜라와 결혼할 때까지 매년 적지 않은 용돈을 주었다고 한다. 46년 해리먼은 랜돌프와 이혼하고 시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며 신문발행인인 비버브룩 경(卿)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신문기자로 생활한다.해리먼은 이때부터 60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제작자 르랜드 헤이워드와 재혼할 때까지 숱한 남 자들과 염문을뿌렸다.미국 CBS 방송 기자 에드워드 모로,CBS사장 윌리엄페일리,파키스탄의 제트기 조종사 알리 칸 왕자,이탈리아 피아트자동차 회사 사주 지아니 아글레리,유럽 제일의 은행가 에리 로드실드 남작등이 모두 그녀의 애 인이었다.애버럴과의 재회는 71년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이 자신의 집에서 주최한 만찬에서였다.7주만에 두사람은 결혼하고 해리먼은 결혼선물로 영국국적을 포기했다. [워싱턴=김용일 특파원] <사진설명>***첫결혼 하던날***39년 10월4일 파멜라 해리먼(당시 이름은 파멜라 딕비)이 런던 세인트 존스 교회에서 윈스턴 처칠의 아들 랜돌프 처칠과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해 하는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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