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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기획] 다시 뜬다, 병아리 감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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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감별사가 떴다. 병아리의 암수 여부를 부화 24시간 만에 구분해내는 양계업에서는 꼭 필요한 직업.

1960년대 국내에 전파돼 한때 해외 취업 붐을 타고 인기를 끌었던 이 직업이 요즘 다시 각광받고 있다.

그간 거의 잊힌 직업이었던 병아리 감별사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무래도 장기화한 불황 때문이다.

국내 경기가 언제 풀릴지 모르다 보니 외국에서 취업이 편하다는 병아리 감별사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글=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회사원부터 동포까지 다양

'병아리 감별사 붐'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곳은 단연 학원들이다. 현재 국내에서 감별법을 가르치는 곳은 수십 군데. 그러나 서울에 있는 대형 학원은 서너 곳 정도다. 이 중 D병아리감별학원은 요즘 40명의 수강생을 교육 중이다. 지난해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인원이다. 또 다른 대형 학원인 S병아리감별아카데미에는 문의전화만 하루 평균 100 여 통이 몰려든다. 조류독감의 여파가 가신 지난해 하반기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단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수강생 중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잘나가는 전통주 회사의 중견 영업사원이던 김익수(29)씨. 그는 최근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병아리 감별사가 되겠다고 나섰다. 더 늦기 전에 해외에 진출하고 싶다는 게 이유. 그는 "뉴질랜드 같은 데서 직접 감별 사업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민을 떠났다 역유학을 오는 이들도 있다. 5년 전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났던 김모(30)씨의 경우가 그렇다.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던 그는 적성이 맞지 않은 데다 형편도 어려워지자 지난해 말 귀국, 병아리 감별을 배우고 있다. 그는 "기술을 익히는 대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양계회사에 취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코리안 감별사, 원더풀~"

이렇게 '후학'들이 해외 취업을 노려볼 수 있는 것은 그간 한국인 병아리 감별사들이 잘해준 덕분이다.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감별사는 80여 개국에 걸쳐 모두 1800여 명. 전 세계 병아리 감별사 인력시장에서 60%를 차지하는 인원이다. 나머지 40%는 현재 사용되는 감별법을 만들어낸 '종주국' 일본의 감별사들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감별사 지원자의 씨가 말랐다. 지금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인 감별사들은 80년대 이전에 진출한 이들로 대부분 고령층. 따라서 조만간 한국이 전 세계 '병아리 감별계'를 제패(?)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이처럼 해외에서의 수요가 계속 생기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위해 감별사가 되려는 이들도 많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조승진(23)씨는 4개월째 학원을 다니고 있다. 조씨는 "기술을 다 배우는 대로 유럽으로 취업해 '주경야독'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업주부 안영미(31)씨는 감별사가 돼 아이들과 함께 해외에 가려고 한단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에 다니는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유럽 쪽에 일자리를 얻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생각"이라며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 아이들에게 조기유학의 기회를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 감별사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여자가 더 잘한다?

-아니다. 빠른 감별을 하려면 손끝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는 데서 나온 근거 없는 편견이다. 현재 활동 중인 베테랑 감별사 중에도 남자가 두 배가량 더 많다.

▶감별사 자격증을 따야 한다?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예전엔 대한양계협회에서 주관하는 자격시험이 있었다. 그러나 1993년 폐지됐다. 지금은 업체들의 채용시험에만 통과하면 일할 수 있다.

▶해외 영주권을 얻기 쉽다?

-나라마다 다르다. 양계업이 주요산업인 유럽이나 남미 일부 나라에서는 평생근무 조건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호주처럼 이민이 까다로운 나라는 그렇지 않다.

▶박봉에 시달린다?

-역시 사실이 아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물가가 비싼 영국에 취업하면 매달 700만원 정도를 받기도 한다. 남미에 진출해도 300만원 이상은 보장된다.

▶병아리만 감별한다?

-그렇지 않다. 오리나 칠면조의 수요가 많은 외국에서는 병아리 감별사가 이들도 함께 감별한다. 단, 이들은 생식돌기가 병아리보다 커 감별이 더 쉽다.

도움말=최윤규 한국병아리감별사총연합회장

*** 세계 감별사 60%가 손 빠른 한국인들

현재 쓰이는 병아리 감별법은 192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마즈이 기요시(수의학) 박사의 작품이다. 그는 부화한 지 24시간이 지났을 때 항문 속 생식 돌기를 확인, 병아리의 암수를 구분하는 법을 정립했다. 문제는 이 돌기가 좁쌀의 반 정도 크기라는 것. 이렇게 작은 것을 확인해야 했기에 그는 밝은 불빛 아래서 손끝으로 털을 밀어올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 감별법의 탄생으로 암수에 따라 양계장 행과 도계장 행으로 병아리의 운명(?)을 일찌감치 가를 수 있어 양계업자들은 사료 값을 절반으로 줄이게 됐다.

한국에 이 감별법이 상륙한 것은 1960년대. 처음에는 축산학과 학생들이 기술을 수입해왔지만, 이후 양계업자들이 배우기 시작하면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현재 국내 최고 숙련자들이 감별할 수 있는 병아리는 1시간에 1600마리다. 단 0.4초 만에 한 마리의 감별을 끝마친다. 이렇게 손놀림이 빠르다 보니 한국인 감별사는 세계 최고로 꼽힌다. 눈동자가 검은색이어서 밝은 조명 아래서도 오래 일할 수 있는 것도 몸값을 높이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병아리 감별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교정시력 0.8 이상이라면 신체조건은 무조건 통과. 단, 좋은 감별사가 되기 위해선 결단력과 임기응변이 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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