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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뉴욕 패션이 통하는 건 늘 변하기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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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디자이너 폰 퍼스텐버그

“원래 ‘디자인’ 하면 아시아 아닌가요?”

의외였다. 현대 패션은 당연히 서구의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즘, 한 시대를 풍미한 서양 디자이너의 대답치곤 말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 회장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사진)가 심층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서양 옷을 입고, 서양 유행을 잘 따라야 세련됐다는 얘기를 듣는 시대. 그의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퍼스텐버그는 “아시아는 원래 모든 것이 디자인과 연관돼(design-oriented) 있었다”고 주장했다. 2006년, 400여 명의 패션 디자이너가 가입된 CFDA의 회장이 된 그에게 ‘최근 아시아계 디자이너가 뉴욕에서 각광받고 있지 않느냐’라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한국의 박물관에서 봤어요. 장신구의 빛깔이 너무 아름다워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색의 조합이나 장신구의 형태·곡선이 너무 오묘했어요. 한글은 또 어떤가요. 정말 귀여운 디자인이더군요. 현대 패션이 시작된 20세기 초를 돌아볼까요. 전부 아시아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이죠.”

현대 패션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중국·일본·인도 등의 전통 자수나 문양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였던 시기다. 실루엣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혁명’이라 부르던 특이한 복식은 아시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퍼스텐버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이번 방한에서 “감명받았다”는 한국 전통 디자인의 아름다움이 다음 시즌쯤엔 뉴욕 디자이너의 작품에서 되살아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장 규모가 가장 커서 경쟁도 제일 치열한 뉴욕 패션계에서 한국 출신 디자이너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CFDA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디자이너 상’은 세계 패션계가 가장 주목하는 이벤트다. 루이뷔통의 수석 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콥스나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을 맡고 있는 프란시스코 코스타도 CFDA와 함께 성장했다. “상은 그저 디자이너 인지도에 도움이 되는 정도예요. 팬들도, 시장도 냉정해요.” 그는 “뉴욕 패션이 주목을 받고 CFDA에서 주는 상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늘 새롭게 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 출신 디자이너가 크게 늘었고, 또 그들이 실력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그 방증”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미국 대표 디자이너들의 단체지만 벨기에 출신인 퍼스텐버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것이나 출신 국가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에게 수상 기회를 주고 있는 CFDA의 다양성과 개방성이 뉴욕 패션의 경쟁력이란 해석이다.

벨기에 출신의 퍼스텐버그는 나이를 무색케 할 만큼 열정적인 어조, 스타일리시한 감각의 원피스 스커트를 입고 인터뷰에 임했다. 이화여대생을 대상으로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여성 기업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강연을 마친 다음이었다.

뉴욕 대표 디자이너 중 하나인 그는 1972년 미국에 진출했다. 2년 만에 내놓은 ‘랩 드레스’는 미국 패션사에 기록된 ‘작품’이다. 랩 드레스는 평범한 원피스처럼 보이지만 기존이 원피스와 달리 지퍼나 단추가 없다. 대신 신축성 좋은 소재를 사용하고 가운처럼 양 옆에서 여며 조일 수 있게 디자인한 것으로 퍼스텐버그가 처음 고안했다. “디자인의 모토는 ‘여자라고 느낄 때 옷을 입으라’라는 것입니다. 아름답되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해 만든 것이 랩 드레스예요.”

(왼쪽부터)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퍼스텐버그의 패션쇼에 선보인 내년 봄·여름 의상. [스타 럭스 제공], 퍼스텐버그가 디자인한 내년 봄·여름용 외투. 얇은 원단을 써서 원피스처럼 보인다. [스타 럭스 제공]

그의 생각이 통했는지 랩 드레스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일주일에 2만 벌씩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불과 2년 만에 500만 벌 이상 판매됐다. 미국인들도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과 놀라운 판매기록을 칭송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면 기사로, 뉴스위크는 표지 인물로 퍼스텐버그의 동화 같은 성공담을 다뤘다.

“패션 공부를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우진 않았어요. 하지만 난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러자면 일이 필요했죠. 내가 귀족과 결혼한 게 동화가 아니라 내가 독립적으로 살아온 게 동화예요.” 벨기에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퍼스텐버그는 22세에 독일 왕족인 에르곤 폰 퍼스텐버그를 만나 동화 속 여주인공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왕자와의 결혼이 동화가 아니라 자립해 패션 디자이너로 살았던 게 동화”라고 했다. 아름다운 프린트와 편안한 저지(니트처럼 짜서 가볍고 신축성이 좋은 직물)가 퍼스텐버그 디자인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86년엔 뉴욕 시장으로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주인공으로 메달도 받았다.

미국 뉴욕에서 이름을 날리자 퍼스텐버그와 함께 사업을 하려는 이들이 줄을 섰다. 화장품도 내놓고 라이선스 사업도 벌였다. “유럽, 고향이 그리웠어요.” 파리로 이주한 그는 패션·리빙·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책을 저술하며 지내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인 92년 그는 또 하나의 성공신화를 이뤘다. 실크 드레스를 디자인해 홈쇼핑을 통해 실시간 판매를 한 것이다. 명성 높은 디자이너로선 드문 일이었다. 개혁적인 발상 덕분인지 그의 드레스는 2시간 만에 130만 장이나 팔렸다.

미국에서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한 그는 또 다른 실험을 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라는 퍼스텐버그는 ‘미트 패킹 구역’에 눈을 돌렸다. 미트 패킹은 뉴욕 맨해튼 서쪽 14번가와 9번가 사이에 있다. 이 동네는 언뜻 보기엔 낡고 오래돼 버려진 곳 같다. 여기저기 돌쩌귀가 떨어져 나간 적갈색 벽돌 건물에는 골재가 삐쳐 나와 있다. 도축장이 모여 있는 곳이라 예전부터 ‘미트 패킹’이라 불렸던 지역이다. 퍼스텐버그가 건물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트렌드 세터 사이에 조금씩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카페, 각종 패션 매장이 곳곳에 숨어 있는 이 구역의 모습은 퍼스텐버그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요즘 패션쇼도 미트 패킹에 있는 매장에서 열고 있다. 지난해엔 회사의 핵심 부서와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도 이곳으로 옮겼다. 퍼스텐버그의 건물 맞은편에는 발렌시아가·디올· 구찌 등 최고급 명품 편집매장인 ‘제프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이 미트 패킹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글=강승민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2008년 현재 400여 명의 패션 디자이너가 가입한 비영리 단체다. 1962년 설립됐다. ‘패션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미국 문화·예술의 한 축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매년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수여하고 있다. 산하 단체인 CFDA 재단을 통해 유방암과 에이즈 예방을 위한 행사를 후원하는 것을 비롯한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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