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더잘할수있다>서울 명진서림 김명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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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음에 와서 살게요.” “일단 책을 가져 가시고 돈은 은행으로 부쳐주세요.” 10일 오후3시 헌책방이 줄지어 선 서울 을지로6가 명진서림.
주부 朴모(34.서울은평구갈현동)씨와 책방 주인 김명진(金明鎭.49)씨가 가벼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네살배기 아들을 위해.자연탐험'시리즈를 구입하러 온 朴씨는 책값 14만원에 4만원이 모자라자 말꼬리를 흐리며 다음에 오겠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고 金씨는 우선 책을 가져간뒤 부족한 돈은 송금하라고 우겼다. 두어차례 밀고당기더니 朴씨는 졌다는듯 金씨가 내민 은행계좌번호가 적힌 명함을 슬그머니 받고는 책꾸러미를 들고 서점을 나섰다.20년째 이곳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金씨는 비록 두평짜리 책방이지만 대형서점 사장 부럽지 않은 넉넉한 마음으로 책과 함께.믿음'을 판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金씨가 처음 신용거래에 나선 것은 90년 어느 여름날.
7세짜리 남자아이가 9만원짜리 그림책 전집이 마음에 들어 사달라고 생떼를 썼으나 엄마는 2만원이 모자라 아이 손을 이끌고서점을 나갔다.그러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뒤 그칠줄 몰랐다.보다 못한 金씨 부인 허군선(許軍先.45)씨가 책 을 싸주고 모자라는 돈은 나중에 보내달라고 했다.
“아이 교육을 위해 책을 사러온 어머니가 2만~3만원을 떼어먹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다른 것은 몰라도 책값은 틀림없이 갚을 것으로 확신했어요.” 許씨의 예상대로 돈은 며칠만에 입금됐다.그뒤 金씨 부부는 책을 구경하고 난뒤 쭈뼛쭈뼛해 하는손님은 거의 돈이 부족하거나 신용카드만 믿고 나온 사람이란 점을 경험을 통해 알았고 이때부터는 먼저 제의했다.물론 이름.주소등을 적어놓거 나 신분증을 보자고 하지도 않는다.
어떤 손님은 흠집이 있는 책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집에가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감사의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金씨 부부는 이렇게 해서 1주일에 서너명씩,지금까지줄잡아 1천여명에게 외상으로 책을 팔았다.그 가운데 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지난해 6월 10만원을 송금하지 않은 40대 중반의 남자손님 한사람뿐이란 것이 큰 자랑거리다.
짧게는 책을 산 다음날,늦어도 한달 이내에는 모두 연락이 왔고 현재.미수금'으로 잡힌 고객 20여명도 조만간 돈을 부쳐올것이 틀림없다.또 한번 인연을 맺은 고객들은 아이들의 나이에 맞는 책을 구하기 위해 해마다 한두차례 서점을 찾아와 지금은 단골이 5백여명이나 된다.
“하루 1백만원 안팎의 매출도 중요하지만 이 각박한 세상에 아직 믿을만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일입니까.” 金씨는 서점을 하는한 외상거래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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