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아버지 신드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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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폭탄을 만드는 사람도/감옥을 지키던 사람도/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 람도/집에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작고한 김현승(金顯承)시인의 시 .아버지의 마음'의 두 구절이다.이 시가 씌어진 시기는 정치.경제.사회가 두루 혼란스럽던 60년대였다.시대적 배경은 그렇지만 이 시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한 아버지의 고뇌가 아니라 모든 아버지들이 본 질적.일상적으로 갖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형상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이를테면.고독의 시인'이 그려내는.아버지의 고독'이다.
사회적 위상이나 경제형편에 따라 가정안에서 아버지의 비중은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안팎의 두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아버지들에겐 말못할 외로움과 괴로움이 항상 뒤따른다.특히 가부장제의 전통속에서 가정질서의 구심점(求心點)역할을 해 온 아버지의존재는 적어도 가정내에선 어떤 권위의 틈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외로움과 괴로움은 가중되는 것이다.
혼자만의 외로움.괴로움 뿐만 아니라 권위 또한 어쩔 수 없이경제적 능력에 따라 강해지기도,약해지기도 한다.셰익스피어의.리어 왕'에 나오는“애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모르는척 하지만,애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모두 다 효자가 된다”는 대목에서 그와 관련한 아버지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난 한햇동안 거세게 휘몰아친 명예퇴직과 감원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아버지의 위상은 급전직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40대,50대 퇴직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에 따라 생계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주부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아버지의 상( 像)은 갈수록 위축되고 왜소해지는 모습이다.
50대 가장의 희생과 죽음을 그린.아버지'라는 소설이 최대의베스트셀러로 떠오르는가 하면,아버지모임 전국연합은 새해 벽두.
아버지 헌장(憲章)'을 만들기에 이르렀다.“현실적인 능력이 아닌 한 인격체의 인품으로서 순수하고 참되게 평가 돼야 한다”는대목이 눈길을 끌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감싸주는 가정의 분위기가 더욱 소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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