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더…기쁨더…] 맞벌이 고민 해결 “육아 시간 연중 50시간 써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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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회사를 설립한 박진호(36)대표는 10살, 8살, 10개월 세 아이의 아빠다. 스포츠마케팅 업체에서 일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던 박 대표는 아이를 위한 좋은 장난감을 찾다가 아예 직업을 바꿨다. 부모 역할을 고민하는 맞벌이 부부에게 아이와 즐겁고 효율적으로 놀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해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결과 ‘두뇌개발’ ‘정서개발’ 등 거창한 목표는 없지만 그림도 그리고 요리도 하면서 스트레스 없이 놀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QED는 ‘육아시간’을 도입해 직원들이 해마다 50시간씩 아이를 위해 쓸 수 있게 했다. 이 회사 박진호 사장(왼쪽에서 두번째)이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콘텐트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이성아(37) 부장과 권경민(34) 과장도 아이가 각각 셋인 엄마다. 2005년 개발팀의 책임자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이 부장은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전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할 자신이 없어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맞벌이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일하는 주부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어요. 회사가 죄책감을 조금만 덜어준다면 엄마들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었죠.”

‘좋은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박 대표는 부모가 된 직원들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직원들과 대화하던 중 일하는 엄마의 큰 고충이 ‘학교 행사나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육아시간(parenting hours)’. 아이를 둔 직원들이 연차 이외에 해마다 50시간을 아이를 위해 쓸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 부장은 올 7월 막내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면서 이 제도를 활용했다. 출근을 한 시간 미루면서, 어린이집에 안가겠다고 떼 쓰는 아이를 데려다 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 아이가 안정을 찾았다. 지난주에는 큰아이가 학교 대표로 참가한 영어발표대회에 응원을 가기도 했다.


권 과장은 얼마 전 아이가 갑자기 아팠을 때 육아시간을 이용해 퇴근을 앞당겼다.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가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가 있더군요. 맞벌이 부부는 미안함을 돈으로 보상하려 하지만 그러면 악순환이 계속되죠.”

박 대표 자신도 아빠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매주 목요일은 항상 5시 퇴근해 아이들과 놀아주고, 월요일에는 아이들에게 아빠와 하고 싶은 일을 한 가지씩 써내도록 한다. 그리고 이런 희망사항을 종합해 주말 시간표를 짠다.

회사의 신입 직원을 선발하는 면접에서도 ‘좋은 부모’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 부모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등의 질문이 포함된다. 아이를 가진 직원은 좋은 직원이기에 앞서 좋은 부모인지도 살핀다. 이 같은 회사 분위기는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로 하여금 결혼과 출산을 ‘축복’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육아시간’을 쓰기 위해서라도 꼭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말할 정도다.

이 부장은 “회사가 엄마의 역할을 인정해주니 직장에서도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를 꺼낸다”며 “일하는 엄마도 위축되지 않는 직장문화가 제일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일과 육아 부담=고학력 여성들이 출산을 미루거나 기피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직장 생활과 육아를 동시에 잘 해내기 어렵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노동부가 올해 삼성전자, SK, 현대자동차 등 국내 30대 대기업의 과장급 이상 여성 50명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 83%가 직장과 가정생활을 모두 충실하게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60%는 직장생활 때문에 출산을 1년 이상 미뤘다고 했다. 이 중 40%는 자녀가 한 명밖에 없었고 없는 경우도 27%나 됐다.

한국보다 저출산의 위기를 일찍 경험한 유럽의 선진국들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대책으로 ‘일과 가정의 균형’을 1순위로 꼽는다. 엄마와 아빠에게 동등한 육아 의무를 부여하는 ‘부모 휴가’, 아이를 가진 부모가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탄력 근무제’와 ‘파트타임 고용제’등은 스웨덴·영국·프랑스 등에서 중요한 국가 정책이 됐다. 부모 역할과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업의 지원도 활발하다.

여성정책연구원 홍승아 박사는 “출산과 육아를 위해서는 노동에서 벗어난 ‘가족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며 “법적 제도는 최소한의 장치이며 제도를 잘 활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업의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하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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