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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폐인'…알고 보면 부모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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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청소년들의 인터넷 활용이 늘면서 게임에 빠져드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학생들이 PC방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중앙포토]

#1 "한번은 새벽까지 게임을 하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겨우 잠들었다 일어나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쓰시는 글자가 컴퓨터 화면에 뜨는 것처럼 보이고요…."(초등학생)

#2 "요즘에는 진짜 바퀴벌레처럼 생활했어요. 닦지도 않고, 속옷도 안 갈아입고 라면 먹으며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우는 폐인 생활이죠. 눈 주위가 검게 변하고 손까지 떨리더라고요."(중학생)

게임 중독 상태에 이른 아이들의 고백이다. 이는 한국청소년상담원 장재홍.이은경.장미경 박사 등이 수행한 '청소년 게임 중독 예방 프로그램 개발연구'에서 드러난 생생한 사례.

어린이.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의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자녀의 인터넷 게임 중독이다.

자녀가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외출할 때면 컴퓨터 자판기나 인터넷 연결선을 숨겨 놓고 간다는 엄마도 많지만 자녀의 인터넷 게임 중독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청소년상담원의 연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린이.청소년의 게임 중독에 부모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연구팀은 경기도 지역 초등학생.중학생 15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이와 함께 초.중학생 30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 조사를 했다. 대상자들은 매일 2~3시간씩 게임을 하는 등 중독 가능성이 큰 학생들이었다.

이은경 박사는 "면접 대상 대부분이 부모에게서 PC와 게임CD를 선물 받아 게임에 접했다"며 심층면접을 통해 나타난 게임 중독의 발생.심화 과정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집에 와도 마땅한 놀거리와 친구가 없고, 다양한 취미생활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점점 게임에 빠져들어갔다.

한 초등학생은 "공부해라 해라 그러면 짜증나잖아요. 하라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게임만 하게 돼요"라고 말했고, 다른 한 중학생은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학교 끝나고 나가 놀고 싶은데 친구는 학원 가느라 시간 없다고 하고, 그러면 저도 게임해요"라고 대답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순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외에 ▶지위 향상의 욕구▶현실도피의 욕구 등의 유형도 있었다.

한 중학생은 "게임 속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내가 대장 같아요. 현실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죠"라고 대답해 지위 향상 욕구가 게임에 몰두하는 한 원인임을 드러냈다.

"동생이랑 싸웠을 때 문 잠그고 바로 컴퓨터를 켜요.그러면 잊어버려요"라고 말한 한 초등학생처럼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충동이 게임에 몰두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들 때 부모들은 제 역할을 못했다. 면접 대상 초등학생들은 게임에 대해 부모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하지 마라'고 야단칠 뿐 욕구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게임의 중독성.위험성에 대해 말해 주는 부모는 거의 없었다.

"엄마는 가게 나가느라 바빠 컴퓨터 게임하는 거 잘 모르고요, 아빠는 2시간만 하라고 하세요."(초등학생)

"아버지는 아무 말 안 하실 걸요. 아버지도 게임하니까. 아버지 대신 제가 게임하기도 해요."(중학생)

인터넷 게임 중독 상담을 많이 해 온 '청년 의사 인터넷 중독 치료센터' 김현수 원장은 "중독된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가정 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생활수준이나 부모 직업.성적과 상관없이 가족 사이에 대화가 없거나 함께 여행을 가본 기억이 없는 등 한마디로 자녀에게 무관심한 가정에서 중독 사례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게임 중독은 마약.도박 중독에 비해 위험성이 작지 않으므로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부모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강압적인 방법보다 아이가 자제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모님께서 게임할 시간을 정하라고 하셔서 제가 주말에만 하기로 정했어요. 아빠가 절 믿으니까 스스로 절제하게 되고요."(초등학생)

이승녕 기자

*** 어떻게 고치나

'강압보다 자제하도록 가르쳐라'.

인터넷 게임 중독을 예방하는 방법에는 왕도가 없다. 스스로 위험성을 깨우치도록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뿐이다.

인터넷 중독 예방 상담센터 김미화 상담연구원은 "전원 코드를 빼거나 마우스.키보드를 숨기는 등 강압적인 금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녀와 사용 시간.조건 등에 대해 합의하고 꾸준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인터넷 게임 중독의 씨앗은 유아기에 형성되므로 게임 외에 비디오.TV 시청, 식사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약속을 정하고 지키는 습관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일단 정한 약속을 부모가 먼저 깨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의 인터넷 이용에 대해 아버지는 관대한데 어머니만 엄격하게 대하면 효과가 없다. 또 부모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기준이 들쭉날쭉해도 곤란하다.

'온라인은 또 하나의 사회생활'이라며 부모의 적극적인 개입을 권하는 전문가도 많다.

'청년 의사 인터넷 중독 치료센터' 김현수 원장은 "부모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표하면서 온라인 친구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부모가 먼저 인터넷 활용능력을 키워 자녀에게 유익한 내용을 권하고▶인터넷 문화와 기술 흐름을 익혀 자녀와 공유하는 것도 중독 예방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어디까지나 예방일 뿐 문제가 심각해지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전문기관을 찾는 게 좋다.

김원장은 "게임 중독 등은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장애와 연결될 수 있다"며 "부모를 속이며 PC방을 전전하거나 나쁜 줄 알면서 자제하지 못하는 등 심각한 상태라면 전문 상담기관을 찾아야 한다"고 권했다.

한편 청소년 게임 중독 실태를 조사한 한국청소년상담원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교사들이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4~7시간 분량의 '게임 중독 예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초.중학생용으로 각각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게임 사용 습관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해 중독의 위험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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