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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세기를찾아서>1.우엘바 과거아닌 미래항한 출항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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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이 시대 최고의 산문가로 평가받는 신영복 교수(성공회대)는 지난해 본지에 국내의 역사적 명소를 찾아다니며 쓴 글.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를 연재해 독자 여러분의 큰 감동을 몰아온 바 있습니다.본지는 그 후속편으로 새해부터.신 영복의 해외엽서-새로운 世紀를 찾아서'를 연재합니다.신 교수는 약 1년간감명깊은 사연을 간직한 세계의 지명과 인물을 찾아다니며 특유의감성과 혜안,탁월한 문장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지구촌의 자화상을 그려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註] 새해에 새 캘린더를 벽에 걸 때 우리는 그 속에 담겨 있는 1년간의 여백에 잠시 행복해집니다.그러나 수많은새해를 맞고 보낸 우리들로서는 이 여백이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결국은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로 채워질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과거의 무게입니다.그러나 올해에는 과거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의속도 때문에 여백이 더욱 줄어든 느낌입니다.더구나 21세기는 새로운 1백년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1천 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나는 멀리 이베리아 반도의 끝에 있는 스페인의 우엘바항구에서이 엽서를 띄웁니다.
1만의 고공에서 8백㎞의 시속으로 우랄산맥을 넘을 때 문득 “20세기는 내게 잔인한 세월이었다”던 당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생각하면 20세기는 인류사의 다른 어느 세기보다도 복잡다단한 1백년이었습니다.우리는,바야흐로 그 20세기 를 마감하고있습니다.
내가 엽서를 적고 있는 이 항구는 작은 마을입니다.그리고 과거의 마을입니다.그러나 이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며유럽과 아프리카가 가장 가까이 닿은 곳입니다.두 대해(大海)와두 대륙(大陸)이 만나는 곳입니다.내가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이곳이 바로 5백년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출항한 항구이기 때문입니다.지금은 그 시절의 융성함도 사라지고인적마저 드문 바닷가에 산타마리아호의 모형만이 바람에 흔들리고있습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콜럼버스 동상에서부터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관곽(棺廓)을 거쳐 이 항구를 찾아오면서 이 길이 결코 과거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이곳은 유럽이 지중해의 역사를 벗어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유럽 주도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합니다.콜럼버스의 출항은 본격적인 식민주의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식민지에서 빼앗은 부(富)와 이 부를 원시축적으로 하여 이룩한 산업혁명의 신화가 현대사의 신념체계라면 콜럼 버스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그리고 식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와 똑같은 동류(同類)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이곳은 지중해를 벗어난유럽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세계화 논리의 출발지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유럽이 중세를 벗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가 이 항구를 떠난 1492년은 바로 그라나다에 있는 아랍왕조 최후의 궁전인 알함브라궁이 함락되는 해입니다.이사벨라와 페르난도왕이 결혼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 이 8백년간의 아랍 지배를 청산하고 국토회복(레콩키스타)을 완료한 스페인통일의 원년입니다.통일에 이은 종교재판과 추방,그리고 식민지 경략으로 나아간 역사의 행보를 예찬할 마음은 없습니다.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강력한 세계경영의 힘은 중세적 분립을 청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잠시 우리의 분단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분단에서 오는 거대한 국력 소모의 청산없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민족적자존을 키워나가기는 어 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16시간의 긴 비행에 시달리는 동안 만약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중국.시베리아.유럽에 이르기까지 육로로 올 수 있었더라면 이 여정이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만남과 추억으로 채워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모항이던 세비야에는 그러한 탈(脫)중세 근세지향의 유적이 지금도 숱하게 남아 있습니다.거리의 이발사가마치 봉산탈춤의 말뚝이처럼 귀족들을 농락하는 오페라.세빌랴의 이발사'와.피가로의 결혼'무대가 바로 이곳 세비 야입니다.풍차를 향하여 말을 달리는 라만차의 돈키호테 역시 몰락해가는 중세기사의 풍자극입니다.어느 것이나 중세사를 청산하고 근세를 지향하는 이야기들입니다.돈 호세가 카르멘을 처음으로 만났던 연초공장은 과연 대단한 규모였습니다.나는 과달키비르강가에 앉아 신대륙 무역의 독점항이던 세비야와 식민지의 부로 쌓아 올린 스페인의 거대한 유적에 착잡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운 역사의 덩어리입니다.황금과 향료에 대한 탐욕만으로 설명하거나.그리스도를 본받는다(크리스토퍼)'는 콜럼버스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지구는 둥글다'는 과학적 탐구로 설 명하거나 이사벨라 여왕과 후아나 공주에게 바치는 바닷사나이의 연정으로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의 신대륙 도착 이후에 빚어진 1천6백만명의 신대륙원주민의 희생과 같은 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간사냥,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그리고 21세기에도 청산되기 어려운 식민주의적 국제원리에까지 생각이 미 치면 그가 서쪽으로 간 개인적 이유는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신대륙발견'5백주년에 행해진 가상재판에서 콜럼버스는 유괴와 살인을 저지른 잔혹한 침략자로 단죄되고 신대륙의.발견(發見)'이 .도착(到着)'으로 수정되기도 하였습니 다..잊혀진 사람'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에게는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에 서있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있는 쪽은 대서양이 아니라 지중해쪽이었습니다.자기의 이유가 그쪽에 있었다는 뜻인지도 모 릅니다.
나는 산타마리아호 선상에 올라가 멀리 대서양을 바라보았습니다..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인디언의 항변이 들려옵니다..세계는 결코 둥글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이 들려옵니다.그리고 지금도 세계의 여러 공항에서 신대륙을 찾아 비행기로 출항하고 있는 수많은 콜럼버스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성공회대학교 교수〉 신영복<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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